‘黨’이란 문자에는 ‘무리’라는 뜻도 있지만 거기서 전의(轉意)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처럼 ‘치우치다’ 또는 ‘서로 도와 나쁜 짓을 숨기다’라는 뜻도 갖는다. 군자부당(君子不黨: 군자는 의견이나 목적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도와 나쁜 짓을 하는 법이 아니다)이라는 孔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자에서 ‘당(黨)’은 결코 좋은 의미의 글자가 아니다. 요즘 관념으로야 정당(政黨)이란 바람직한 정치집단이고, 정당끼리의 다툼 또한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한자문화권의 전통적인 관념으로는 당을 짓는 것 자체가 비난의 대상일 뿐 아니라 당파간의 다툼 즉 당쟁은 나라를 망치는 첫째 원인으로 꼽힌다. 아무리 이념이 다르고 색깔이 달라도 오로지 내세우는 제일의 가치는 ‘和’요 ‘안정’이다. 그러다보니 한자문화권에서는 갈등이나 대립과 같은 것 자체를 혐오하게 된다. 따지거나 불평하는 녀석에게는 늘 눈총이 모인다. ‘黨’이란 것에 대해 그렇게 익숙해온 한자문화권이다보니 ‘政黨’이란 것에 대하여도 문자적 힘이 미치는가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정당이라면 으레 이익을 챙기려 모인 잡배들의 집단으로 인식되고, ‘黨爭’이라면 으레 국회의사당에서 멱살잡이도 불사하는 천하 몹쓸 놈들의 행위로 인식되곤 한다.
‘黨同伐異’란 문자적 해석으로는 ‘같은 사람끼리는 무리를 짓고 다른 사람은 내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익이건 목적이건, 혈연이건 지연이건, 자기와 같거나 비슷하다고 판단되는 사람과는 시비곡직을 불문하고 한가지로 행동하여 무조건 감싸주고, 반대로 조금이라도 자기와 다르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공격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문화행태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다섯 번에 걸쳐 설명한 중국문화 특징들의 연속이다. 하나하나 설명하자니 여섯이지만 기실은 일관한다. 그것은 중국인의 이분법적인 세계관과도 통한다. 피(彼)니 아(我)니, 손(損)이니 익(益)이니 하는 구분도 그렇고, 우주를 음과 양 두 가지의 운동으로 보는 것도 그렇다. 일 년을 춘추의 두 가지로만 파악할 때는 세상을 음과 양 두 가지의 운동으로만 설명하다가, 보다 세분하여 춘하추동의 사계로 구분하면서부터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의 사상(四象)운동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마치 우주변화의 기본원리처럼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그럴싸하다. 중국의 세계관(특히 음양오행 또는 氣철학 따위)에 도취한 사람, 또는 서구문명의 한계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중국 고유의 문화에서 무언가 건지려는 사람에게는 귀가 솔깃할 내용이다. 전기(電氣)란 것도 결국 음양을 이용한 것이요, 요즘 맹위를 떨치는 컴퓨터라는 것도 결국 음와 양의 구별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니 중국인의 사유방식은 얼마나 심오한가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사에 있어 혈연이건 지연이건 자기와 같거나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사람과는 시비곡직을 불문하고 한가지로 행동하여 무조건 감싸주고,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공격한다면 그런 행위를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요즘 서구적 가치관으로 하는 말이지 옛날 가치관으로는 옳았지 않았을까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과거 중국인들도 그런 행태를 비난하고자 당동벌이라고 말한 것이지 그것을 숭상해서 만든 말은 아니다. "명실상이"편에서 지적했듯이, 중국인들은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행동하는 바가 언제나 다르다. 중국에서 만든 사자성어(四字成語)나 우리나라의 표어와 같은 구호들은 언제나 뒤집어 읽으면 된다. ‘주차금지’라고 쓰인 곳이 주차를 많이 하는 곳이고, ‘소변금지’라고 쓰인 곳이 소변을 자주 보는 곳임과 같다. 따라서 당동벌이는 한자문화권 사람들의 적실한 행태로 보아도 틀림없다.
그러면 당동벌이의 행동양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同과 異라는 二分으로 풀어야 할 음양철학의 범주인가? 그럴 것조차 없다. 그냥 보면(觀하면) 된다. 그저 본능이라 할 수 있는 동물적 텃세일 뿐이다. 앞서 언급한 적서차별이 텃세문화이듯이 당동벌이도 그저 자기로부터 남을 소외시키기 위한 작업에 불과하다. 같은 사람과 당(黨)하는 것은 남을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끌어 들여 텃세를 유지하기 위한 짓이고, 다른 사람을 벌(伐)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영역 즉 텃세를 침해당하지 않으려고 지키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당동벌이를 계속하다보면 덩치 큰 놈이 다 차지하게 된다.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말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이라고 분개하지만 그네들의 문화로서는 충분히 당연한 일이다. 중국과 같은 점(同)을 추려보자면 중국과 같은 당(黨)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는 가능한 한 중국과 차별화하는 것이 중국에 대항하고 중국을 능가하는 첩경이라고 주장한다. 유교문화도 그렇고 한자의 사용도 그러하다. 지금 우리가 수천년만에 처음 중국을 굽어볼 수 있는 지위를 갖게 된 것도 다름 아닌 일백여 년간의 중국과의 단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자문화권의 가치관에는 이와 같이 텃세를 바탕으로 한 관념들이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이 소외당하는 것은 죽음과 같이 여기면서도 남을 끝없이 소외시키는 작업에 몰두하는 일은 생물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의 생물로만 남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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