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에게서 비롯한 유학이라는 학술체계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 모습과 성격이 바뀝니다. 가장 획기적인 바뀜은 漢의 무제가 유술(儒術)을 국교체제로 만든 것이고, 다음으로는 南宋의 주희가 유학을 리학(理學)이라는 체계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학은 한무제 이후 관학(官學)의 지위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가 여러 종단으로 나뉘어 난만하게 발전하다가, 당왕조 무렵이면 중국의 사상계와 문화계를 장악해버립니다. 최종적으로 주도권을 잡은 종단은 중국화한 불교라고 할 수 있는 선종이지만, 교종으로 분류되는 천태종과 화엄종 등의 사유체계는 화이사상을 교조로 여기던 중국의 식자인들, 그러니까 유자들의 자존심을 건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오랑캐의 종교가 중원을 휩쓴다는 사실에 자존심을 다친 부류는 유자들 말고 또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교에 대적할 수 있는 종교종단을 만들고자 중국의 토속 신앙과 노장사상을 합하여 도교라는 종단을 만듭니다. 대장경에 필적할 만한 문헌들도 급조하여 도장(道藏)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해서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하이관(夏夷觀)을 교조로 받드는 유자들과 도사들은 서로 불교를 공격하면서 긴 세월 동안 우열을 다투게 됩니다. 당왕조 때는 왕의 성씨와 노자의 성씨가 같다는 이유로 도교가 상당한 정도 위세를 떨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삼교의 다툼은 근본적으로 우열을 내릴 수 있는 다툼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이었기에, 세 종교의 궁극은 일치한다는 생각이 바야흐로 퍼지게 됩니다. 바로 그 무렵, 한족 중심의 유자들은 유학을 불교에 못지않은 사유체계로 만들겠다는 의욕을 갖게 됩니다.
그 의욕은 점차 영글다가 송왕조가 중원지역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밀려나 있을 무렵, 주희(朱熹,1130~1200)에 의해 결실하게 됩니다. 주희는 범중엄(范仲淹,989~1052), 호원(胡瑗,993~1059), 손복(孫復,992~1057), 석개(石介,1005~1045), 소옹(邵雍,1011~1077), 진양(陳襄,1017~1080), 주돈이(周敦頤,1017~1073), 장재(張載,1020~1077), 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頤,1033~1107) 등 선배들의 사유를 바탕으로 자신의 구상을 완성합니다. 그는 유교 경서에서 일정 부분을 발췌하여 우주가 움직이는 모습과 인간의 품성을 설명하는 이치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일과 사물에는 理가 있다고 확신하였고, 스스로는 도덕적으로 수양하기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주희는 어떤 이치나 원리를 만든 것은 아니고 세상은 理와 氣로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道’라는 글자로써 상징되던 유학은 ‘理’라는 글자로써 상징하게 되고, 그처럼 면모를 일신한 유학을 리학(理學)이라 부르게 됩니다. 주희는 오랑캐의 사유체계를 능가하는 학문체계를 만들었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을 텐데, 그것은 결국 漢 이후 다져진 ‘천하일통’이라는 한족 중심의 세계관을 확인하는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희의 학문을 전통적인 이름인 도학(道學)으로 부르기도 했고, 주희를 기리는 차원에서 주자학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리(理)를 중시한다는 뜻에서 리학이라 부르기를 선호했습니다. 그리고 理란 곧 성(性)임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성리지학(性理之學)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풍우란(馮友蘭,1894~1990)이 『중국철학사』에서 그것을 ‘신유학’이라고 부른 이후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만, 순자(荀子,313~238BCE)가 유가의 경전들을 새롭게 정리했을 때도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신유학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주희가 재구성한 유학은 원조 명조 청조를 거치는 동안 관료를 선발하는 표준이 되어 위세를 떨치게 되고, 주변 국가들에도 보급됩니다.
주희는 이적(夷狄)의 종교라는 이유로 불교를 배척했지만, 유교에도 불교의 법통과 같은 도통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성인의 가르침은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 주공, 공자, 맹자, 정이, 주희의 차례로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유자들은 경전의 자구 해석에만 몰두했다고 비판하면서, ‘의리’ 위주로 재해석합니다. 주희의 체계를 리학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가 어떤 원리나 이론을 ‘만들어서’가 아닙니다. 우주가 움직이는 모습과 인간의 성품에는 일관하는 리(理)가 있다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인간이 감각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들은 理가 발현된 氣로 여겼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중국의 학술사에는 이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중국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고대 중국인의 사유방식에는 이론(theory)이나 원리(principle)와 같은 개념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학술사는 교조를 받들면서 그 교조를 해석하는 것이 주축입니다. 교조에 대한 의문이나 반박은 용납되지 않았고, 학술에서도 질서를 요구했습니다. 오늘날 중국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의 학자들이 근대 이후 서양철학에 견줄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아내서 구성한 것일 뿐입니다.
理가 중요하다면 무엇이 理인가 하는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물음에 리학자들은 그저 ‘性卽理’(性이 곧 理)라는 정이의 말을 반복하기만 합니다. 性이 理라면, 性은 또 무엇이냐는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 물음에도 주희는 자신의 사유를 말하지는 않고 유가 경전의 문구를 인용합니다.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면 가장 좋았겠지만, 『논어』에 의하자면 공자는 性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하니 다른 데서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례기』의 한 편인 「중용」에 있는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천의 명령이 성, 성을 따르는 것이 도, 도를 닦는 것이 교)’라는 대목으로써 대답합니다. 하지만 의문은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천의 명령이 性이라면, 天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후의 물음에 대답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天은 왕권의 근거로서 구상된 개념이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天이 보낸 사람이고, 자신도 죽으면 天이 된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것은 왕의 권위는 육신이 죽더라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확신시킬 필요에서 만든 구상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天의 명령은 곧 왕의 명령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공자의 사유체계는 天에 관한 그러한 관념을 토대로 형성된 체계이고, 주희의 학문체계는 공자의 그러한 사유체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탐구한 결과 형성한 관념체계가 아니라 치세(治世)의 방법론으로서 궁리된 체계입니다. 천하를 治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천하의 질서는 군신관계를 중심으로 다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주희는 치세의 논리를 『례기』의 「대학」에서 찾아 제시합니다. 이른 바 삼강령(明明德, 新民, 止於至善)과 팔조목(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중용」과 「대학」을 『례기』에서 독립시켜 『논어』 『맹자』와 나란한 경전으로 격상시키고는 ‘사서’(四書)라고 불렀습니다. 짓지는 않았지만 새 경전을 만든 것이지요.
주희는 마호메트 이후 영향력이 가장 컸던 교주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인데, 그가 지닌 영향력은 기실 사유체계가 아닌 문장력이라고 봅니다. 글쓰기는 어느 문화권에서든 중요하지만 문언문 체계를 사용하는 한자문화권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무슨 내용이든 문장이 좋지 않으면 유통되지 못했습니다. 문장의 형식미가 좋지 않으면 어떤 사유나 어떤 주장도 유통될 수 없습니다. 역사상 훌륭한 유학자는 결국 훌륭한 문장가였습니다. 중국사에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치고 문장가 아닌 사람이 드뭅니다. 모택동도 무력이 아닌 문필력으로써 권력을 잡은 사람입니다. 유교체제 국가에서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도가 결국 문장력 테스트였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공자는 평생 바람직한 통치를 꿈꾸었던 사람입니다. 철학이나 교육에 전념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생각을 정리한 유학은 그래서 통치술입니다. 유학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로 퍼질 수 있었던 것도 통치술이었기 때문입니다. 학문이 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치술의 기초는 통치 담당자들의 자질이니, 례와 악을 수련하여 자질을 갖춘 사람이 통치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습니다. 통치술인 유학을 오늘날 철학이나 윤리처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수련을 통해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는 부분 때문입니다. 맹자는 통치 담당자들의 자질보다 군주 한 사람의 자질을 더 중시했습니다. 권력은 집중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한무제 이후 유학은 유교체제의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漢의 확장과 더불어 그 체제와 그 이데올로기 또한 주변 국가들에게 보급됩니다. 글로벌 표준이 되어간 것이지요. 중국인들은 그 영광을 지금까지 잊지 못합니다.
한편, 주희와 동시대 사람인 육구연(陸九淵,1139~1193)에서 시작하여 명대의 왕수인(王守仁,1472~1529)에 이르는 한 무리의 유자들은 ‘性卽理’라는 주희의 생각에 반대하면서 ‘心卽理’를 주장하게 됩니다. 理라는 것이 짐작하기도 어려운 ‘하늘의 명령’이라는 주희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확실한 理는 인간 개체의 心이 작동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전체보다는 개인에게 더 무게를 두는 사유체계였던 것이지요. 그 유파도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는데, 그 유파는 ‘心이 곧 理이다’라는 주장을 하므로 ‘심학’, 또는 왕수인의 아호를 따서 ‘양명(陽明)학’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리학은 명대 이후 주자학과 양명학의 두 흐름이 있게 됩니다. 두 유파를 구분할 때는 성리지학과 심리지학으로 나누어 부르지만, 아울러서 부를 때는 송명리학(宋明理學) 또는 심성지학(心性之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학의 목표 자체가 ‘전체’에 있는 만큼, 왕조체제의 전제정권하에서는 개인을 강조하는 양명학이 주류가 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원대와 명대를 거치면서 관방(官方) 학문은 성리지학이 차지하게 되고, 조선을 비롯한 유교문화권 전반에서 양명학은 핍박을 받기까지 합니다.
‘성리학’은 ‘성리지학(性理之學)’을 줄인 이름입니다. ‘성리지학’은 ‘性卽理의 학’이라는 뜻의 서술적인 이름이면서, 심리지학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정치적인 이름이기도 합니다. 조선에서도 일반적으로는 리학, 주자학, 성학(聖學), 또는 도학(道學)이라고 불렀지만 성즉리를 강조하고자 할 때는 ‘성리지학’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한제국기 무렵 ‘之’ 자를 빼고 ‘성리학’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나타나더니, 일제강점기에 이르자 조선왕조가 멸망한 것은 그것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리학’이라는 이름이 보편화됩니다. 조선의 리학은 중국의 리학과 차별된다는 생각에서 ‘조선성리학’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리학’이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주자학’이라고 부릅니다. 대한제국기는 조선왕조에 대한 반성적 비판이 일어나던 시기로서 주자학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분위기가 일었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 정약용의 『흠흠신서』 및 『목민심서』 등 주자학과 궤를 달리했던 서적들을 중시하는 경향도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나중에 ‘실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성리지학은 관학의 지위를 차지하지만, 중국의 경우 심리지학을 비롯한 다른 유파들을 차별적으로 억압하지는 않았습니다. 시대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별도의 흐름 정도로 간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쿠데타를 통해 조선왕조를 창업한 사대부 집단은 성리지학만을 교조로 받들면서 고려왕조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는 불교는 물론, 도교나 심리지학마저 철저히 배척합니다. 그들은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바탕으로 우주론을 확장하고, 이기설을 중심으로 인성에 대해 논쟁하며, 존심(存心)과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개인 차원의 실천윤리를 드높이게 됩니다. 군자의 실천 덕목을 담은 교재로는 『소학』을 꼽았고, 현실정치에서 구현되어야 할 군자다움의 항목은 『례』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도덕적 명분에 집착하여 가혹한 엄격주의를 지향하였습니다. 성리지학 아닌 것에 관심을 두기만 해도 사문난적으로 몰아 폐족시키는 사례가 흔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교조화한 주자학이 받쳐주는 정치적 안정성 때문에 조선왕조는 5백 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외적 안정성은 오늘날 조선이라는 국호까지 이은 북한에서도 여전히 나타납니다. 공화국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는 3대째 세습하는 왕조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북한이라는 나라가 바로 조선성리학 이념으로써 유지되는 체제라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조선왕조의 유자들은 유학이 곧 통치술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진정으로 염원하였는데, 그것은 요·순·우 삼대에 이루었던 이른바 지치(至治)를 이 땅에 다시 실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례기』에서는 그런 세상을 대동(大同)세상이라 부르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공평무사하게 된다. 어진 자를 등용하고 재주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친하지 않고 자기 아들만을 귀여워하지 않는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쓰이는 바가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홀아비·과부·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는 모두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모두 시집갈 곳이 있도록 한다. 땅바닥에 떨어진 남의 재물을 반드시 자기가 가지려고 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자기가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간사한 모의가 끊어져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놓고 닫지 않으니 이를 대동이라 한다.”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그러한 대동세상의 실현을 목표로 지치(至治)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군주는 례와 덕을 갖춘 현철군주(賢哲君主)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통치계급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리학의 실천 덕목을 극도로 요구했습니다. 인간다움으로서 義와 理가 무엇인지를 고지식하게 따졌습니다. 인도(人道=인간다움)를 천도(天道=하늘의 원리)와 맞추는 것이 ‘성즉리’라는 생각에서 인도와 천도를 각각 섬세하게 따졌습니다. 조광조가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문인들을 배격하고 덕을 갖춘 사람을 선발하는 현량과를 설치했던 것이나, 중종에게 수기(修己)를 통하여 성군(聖君)이 될 것을 요구했던 것은 그런 방법론이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필수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조선의 사림은 모두 조광조를 스승으로 받들게 됩니다.
조선의 유자들은 관념론에도 몰두하였습니다. 그것에는 몇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우주의 본체는 무엇인지, 우주를 움직이는 것이 원리(=理)인지 힘(=氣)인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지, 개인은 어떻게 수양해야 하는지 등입니다. 우주 본체에 대한 궁리에서는 태극도설과 음양오행설을 주로 다루었고, 우주를 움직이는 힘에 대한 궁리에서는 퇴계의 주리론과 율곡의 주기론이 대립하였습니다. 그런데 퇴계와 율곡은 理와 氣라는 이름을 강조했을 따름이지 理는 무엇이고 氣는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 바는 거의 없습니다. 理니 氣니 하는 것은 실증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이름이 아니었기에 당연했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궁리에서는 주로 사단칠정이라는 맹자의 언급을 가지고 논쟁했습니다. 개인의 수양이나 士로서의 행동기준에 대해서는 각종 례론을 가지고 각축하였습니다. 관념론의 궁극은 주경궁리(主敬窮理:공경을 위주로 이치를 따짐)니 의(義)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 사대부들이 관념론을 날카롭게 벼리는 행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결과는 또 어떠하였습니까? ‘누가 더 높은가’, 또는 ‘무엇이 더 위인가’와 같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비교기준을 평생토록 익혀 지배계층에 올라선 다음, 그 단순하기 그지없는 비교기준에 반하는 사람들을 가뭇없이 처단하면서 이상사회를 만들겠다고 부르짖는 일이지 않았습니까? 도그마의 종파 싸움을 통해 집권하게 되니까 도그마를 중심으로 붕당을 이루게 되고, 붕당정치는 결국 소수의 세도정치로 귀결되며, 세도정치는 종당에 무능과 부패를 낳을 수밖에 없고, 그 끝은 나라를 팔아먹는 데 이르지 않았습니까? 조선왕조는 전쟁에 져서, 또는 침략을 당해서 식민지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왕이라는 존재는 사대부들이 집권하는 데 유용한 장치로 기능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왕에 대한 충성이라는 명분으로써 자기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한 다음, 문약한 왕의 입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이 행사되도록 만들었던 것이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이루겠다고 자부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통치구조였기 때문입니다. 명분이야 군주를 위하고 왕조를 위해 헌신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관념이나 욕망을 위해 군주와 왕조를 이용하는 일로 평생을 일관합니다. 그런 사대부들일수록 명분의 다툼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조선왕조 집권 사대부들은 공자가 이상으로 여겼던 정치구조를 자기들이 거의 이룩했다고 자부했던 듯합니다. 明왕조의 천하질서에 맞추고자 하는 의욕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왕조를 창업했다가, 明이 망하고 淸이 들어서자 淸에게는 칭신(稱臣)하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이제 중화의 적통이 조선에만 남았다고 선전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도덕적 명분과 도그마에 사로잡히면 현실을 균형 있게 보지 못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집권하면 비극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념을 강조하는 권력치고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지 않은 역사는 없습니다. 도덕적 엄격주의는 자신에게는 가혹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가혹한 것이 역사적인 교훈입니다. 선명한 기치를 내세우는 당파가 집권할 때마다, 다른 당파의 사대부들을 떼로 죽입니다. 조선왕조의 그러한 통치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이은 나라가 바로 국호조차 그대로 사용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왕조입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외세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성리학 전통의 교조주의적 경향이 북한보다는 덜했지만, 성리지학을 이념으로 내세웠던 조선왕조에 대한 비판적 점검, 그리고 식민지가 되어야 했던 원인에 대한 분석에는 많이 소홀했습니다. 이제라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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