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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문화

조선 디아스포라 3

by 曺明和 2024. 3. 16.

조봉학, 남, 1915년생 

훈춘시 춘성향 고산촌 거주

나는 조선 함경북도 갑산군 운흥면 장항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집 뒤에는 산이 있었고 집 곁에는 배나무 한 대가 있었다. 그리고 산굴이 있었다. 그때 우리 집을 두구 <배나무집>이라고도 했고 <삼굽집>이라고도 했다. <삼굽집>이라고 한 건 삼을 굽는 구뎅이를 우리 집 곁에다 만들어 놓았다고 그렇게 불렀다. 그때 토스레를 입기 위해 베를 짜는데 쓸 삼을 집집이 심었댔다. 삼을 거둔 다음 구뎅이에 가져다 구뎅이의 한쪽 칸에 돌을 가득 넣어서 부엌을 만들고 다른 한쪽 칸에 삼을 놓고 삼찌기를 넣어서 불을 일궈 돌을 달구었다. 돌이 세게 단 다음 우를 콱 묻어놓고 구멍을 파고 모두 모여들어 녀자들은 물동이로, 남자들은 바게쯔로 물을 길어다 세게 단 돌 우에 콱 뿌렸다. 그러면 김이 삼무지에 확 나가서 삼이 익었다. 

우리 집 식구는 모두 여섯이었는데 아버지, 어머니, 맏형님, 둘째형님, 동생, 나 이렇게 살았다. 우리 집은 다 찌그러지는 형편없는 집이었다. 노전이라는 건 깔(갈)도 없어서 전부 참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이었고, 먹는 것이란 감자 같은 것으로 겨우 끼니를 잇는 형편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를 다닐 나이였지만 생활형편이 그러니 다닐 수 없었다. 후에 일본사람들의 서당에 가서 월사금을 한 달에 30전씩 내고 석 달가량 공부하다가 퇴학맞았다. 그런 뒤로 다시 학교라는 델 가보지 못했다. 

그때 조선에서는 잘 사는 사람을 부자라고 했다. (우리 마을은 30호가량 되였는데 3호가 부자집이었다.) 우린 부자집 밭을 부쳤는데 농사를 져서 절반은 부자에게 주고 절반은 자기가 가졌다. 먹을 게 없어서 먼저 열 말을 꿔서 가져오면 년말에 가서는 스무 말을 내야 했는데 그걸 주고 나면 빈털터리루 나앉았다. 그다음엔 하는 수 없이 또 꾸고 하여 갈수록 빚만 늘어났다. 

당시 일본놈들이 조선에 둥지를 틀구 있었는데 놈들은 부자집에 와서 술을 퍼먹구 개나 닭을 잡아먹구 하였다. 그걸 우리는 접근두 못하구 구경이나 하는 신세였다. 그땐 조선경찰놈들이 일본놈들에게 잘 보이느라구 일본놈들보다 더했다. 경찰소라는 건 일본놈들이 소장이요 부소장이요를 하구 조선사람들은 전부 그아래서 순사노릇을 했다. 일본순사놈들은 늘 칼을 차고 마을을 싸다니며 지랄을 피웠는데 쩍하면 답새기구 부녀들을 겁탈하군 하였다. 우리 동네에 낯이 곱살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일본순사놈이 눈독을 들여 글쎄 그의 남편에게 죄를 씌워서 6년징역살일 보내구 제가 그 아주머닐 데리고 살았다. 

일본놈들은 조선에서 값진 보물을 많이 빼앗아갔다. 금이랑, 은이랑, 주요한 자원은 뽑아서 제 나라루 가져갔다. 리완용이 조선을 팔아먹지 않았는가. 

빚우에 빚을 지니깐 에라 못살겠다, 간도로 가자 했다. 그때 간도는 살기 좀 괜찮다구 소문이 나있었다. 마침 먼저 홀몸으로 삼촌을 찾아서 두만강을 건너 훈춘 춘화에 간 둘째형님한테서 편지가 왔었다. 둘째형님은 집단부락을 개척할 때 왜놈들이 구제금과 구제량을 준다는 말을 듣고 떠났던 것이다. 인편에 보낸 그 편지엔 조선에선 생활이 구차하니 그곳으로 나오라구 씌여져있었다. 

편지를 받구 75세나는 아버지하구 70에 나는 어머니하구 내 동생 이렇게 셋이서 먼저 들어오구 강덕 4년에 맏형과 맏형수, 나하구 그리구 태여난지 여섯달두 안 되는 조카까지 해서 넷이 빈털터리루 건너왔다. 정든 고향땅을 두구 떠나자니 눈물이 쏟아지는것을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하면 기막히는 일이였다. 

때는 동지달이였는데 두만강이 이미 땅땅 얼어있었다. 가만, 그러니깐 그것이 37년도 11월 7일이다. 간도땅을 건너오구나니 입은게란게 있는가. 추워서 어쩔 수 없었다. 헌 삿갓에 홀옷바람이였다. 또 일본놈들 감시가 어찌 심한지 매를 맞으며 두만강을 겨우 건너왔다. 

간도땅에 들어선 뒤 돈이 없어서 훈춘에서 춘화 두강자까지 걸어서 갔다. 가보니까 글쎄 아버지, 어머니가 집두 없이 풍막에서 살고있지 않겠는가. 거기두 일본놈들이 아주 많았다. 한창 토성을 쌓고있었는데 일본놈들이 으르렁거리는 세빠드를 데리구 다니며 일을 어지간히 안하는 사람이 보이면 세빠드를 추겨대군 하였다. 먹는 건 전부 옥수수였다. 그것두 배불리 먹지 못했다. 입쌀이라는건 보구 죽가 해두 없었다. 

생활이 구차하다보니 글쎄 건너가서 두달두 못돼서 19살 밖에 안 되는 생때같던 우리 아주머니가 그만 병에 걸려 사망됐다. 태여난지 두달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를 두구. 그래 나는 또 두달만에 조카애를 업구 조선으로 되건너갔다. 

어린아이를 업구 다시 두만강을 건너가니깐 야, 글쎄 그 애가 구토설사를 마구 하였다. 그래서 치료를 하다가 그만 돈이 딱 떨어져서 그곳에서 떠났다. 가다가 도중에서 그 애가 죽었다. 조선 산굴이라는데 가서 그놈거 묻자구 하니까 거기 부자놈이 나서서 제 고장에 가지구 가서 묻어야지 안된다고 하였다. 그래 죽은 아이를 업고서 10리를 내처 걸었다. 그날이 바루 장날이다. 숱한 사람들이 장보러 왔다가 업은 아이를 보자구 했다. 아, 죽은 아이를 어떻게 보이겠는가. 기가 딱 찼다. 

그래서 내가, <얘를 금방 약을 먹여가지구 온다>구 하면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그래서 <야, 이 아이 죽은거 업구 온다. 묻어달라.> 했다. 그래서 그 친구 같이 가서 파묻었다. 나는 로비를 팔아 새옷을 사입히구 아이가 입던 옷은 보따리에 싸서 함께 파묻었다. 이튿날에 가보니깐 글쎄 아이 무덤에다 파묻은 보따리를 누군가 파가지 않았겠는가. 

그후 나는 외토리루 있다가 일본놈들이 앉힌 저고리공장에 들어가서 일해 먹었다. 후에 우리 맏형님도 조선에 건너왔다. 둘째형님은 중국에서 데릴사위질 3년 해야 되니 우릴 보구 어떻게 부모를 모셔갈 수 없겠는가 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때 맏형님은 <나는 이젠 못가겠다. 열아홉살난 애에미를 거기에 묻구 내 어떻게 또 간단 말이니!> 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없소. 형제간에 달리 돌봐는 못줘두 내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겠소.> 하고는 또 조선을 떠났다. 그러니깐 강덕 5년에 다시 중국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중국에 들어와서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보니깐 형편이 없었다. 옷이란게 너덜너덜한 걸 입었는데 거 지금 텔레비에 나오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던 그 거지 옷과 똑같았다. 그해 아버진 76세구 어머닌 71세, 동생은 14살이였는데 집두 없이 남의 헛간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째형은 남의 데릴사위질 하고있었다. 그래 내 열네살 먹은 동생을 데리구 거기서 생활을 하다가 왕청으로 갔다. 거기서도 벌이가 되지 않으니 부모를 모시구 훈춘으로 갔다. 거기서 탄광일을 하였다. 지금 우리 로친네 본가집 사랑방을 하나 빌려가지구 거기서 살았다. 역시 앞이 막막해났다. 그래서 내 또 맨발바름으로 삿갓을 쓰고 와이샤쯔를 하나 걸치구 삯짐을 메면서 벌었다. 

후에는 또 생계를 위해서 일본놈들이 벽돌을 굽는데 가서두 일했다. 일본놈들의 벽돌을 굽는데 1천장에 겨우 1원이였다. 동생을 데리구 일을 했다. 천장을 둘이서 하루종일 해두 해내기 바빴다. 그래 거기서 한 1년을 벌어먹다가 춘화에 가 금을 파내는 일을 했다. 일곱이서 50원을 모아 굴을 만들었다. 내 그해 23살인데 거기서 나이가 제일 많았다. 그래 아래또래들을 대리구서 백메터 되는데로 내려가서 하루에 한립방이나 되는 흙을 파내야 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한립방을 못파내였다. 하루종일 일해두 50-60전 벌이두 안되였다. 그래서 8월 추석날에 부모한테 간다구 하면서 증명서를 가지구 도망을 했다. 

그때 일본놈들 세상에선 어디루 가자면 증명서를 내야 했다. 머리라는게 한발이나 돼가지구 밤중으로 도망 빼는 판이였다. 우도구에 와 하루밤 자구 겨우 빠져나오다가 생뚱같이 머리때문에 왜놈들한테 붙들렸다. 그때 내 하이칼라머리를 하였댔다. 그땐 하이칼라머리를 금지할 때였다. 글쎄 머리두 제 마음대로 못하구 다녔다. 그래 순사란 놈이 내 목덜미를 쥐구 자자고 하였다. 경찰소로 가는 것이였다. 안에 들어가니 난로불을 한쪽에 피워놓고 순사 한놈이 앉아있었는데 나한테 어디루 가는가구 물었다. 내가 부모 보러 간다구 하니 그 일본순사놈이 기다란 칼을 차구 절컥거리며 다가왔다. 그놈이 이것저것 짜지구 묻더니 불시에 군도를 쑥 뽑더니 내 머리를 움켜쥐고 뭉텅뭉텅 베지 않겠는가. 그래도 나는 한마디 말도 못했다. 그놈들과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렇게 중국에 와서도 사처로 돌아다녔다. 부모를 모시구 훈춘, 돈화, 왕청, 룡정 아니 다닌데 없다. 후에 우리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셋째야, 내 죽어두 네 은혜를 못잊겠다> 하고 말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이렇게 말할 때야 그 속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또 그때 자식으로서의 나는 속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실루 타향살이 몇십년에 기가 찬 고생을 했다. 죽어두 고향땅에 가서 죽자구 했는데 인젠 고향생각두 너무 먼 옛말 같이 남아있다. 대신 우리의 두손으로 일궈놓은 정든 땅에서 근심걱정 모르고 여생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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