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통사회는 봉건제도로 유지되었다고 우리는 배웠고, 실제 '봉건타도(封建打倒)'는 중국에서 20세기 내내 구시대를 청산하자는 상징적 구호였다. 하지만 중국은 청나라 때까지 봉건제도를 실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었으며, 그런 구호는 왜 나오게 되었는가.
봉건제도란 인간관계를 主從(王과 臣)의 관계로 규정하여 질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王을 主로 삼으면 侯이하 나머지가 從(=臣)이 되고, 侯를 主로 하면 公卿 이하 나머지가 從(=臣), 公卿을 主로 삼으면 大夫이하 나머지가 從(=臣)이 되는 방식이다. 이렇게만 보면 매우 불합리한 피라미드식 계급구조이다. 그러나 왕은 여러 후에게 특정한 땅(封土)을 지정해주면서 그 땅을 자손대대로 차지하게 하되 臣으로서의 의무만을 다하도록 약속받는데, 후는 다시 공경들에게, 공경은 다시 대부들에게 땅을 비롯한 여러 권리를 차례로 분배해주게 된다. 다층의 계급구조이기는 하나 일정한 의무만을 지게 하는 대신 아랫사람의 권한은 일체 간섭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점에서는 어찌 보면 바람직한 구석이 있기도 하다.(다만 요즘 안목으로 보자면 계층간의 이동이 자유로워야 할 터인데 그런 것은 논외로 하자) 그래서 우리는 ‘중국의 봉건제도’라는 말을 들으면 왕에 대한 諸侯의 연례적인 朝貢과 같은 격식 있는 儀禮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중국에서 그런 식의 봉건제도가 시행되었던 기간은 실상 얼마 되지 않는다. 제도로서의 봉건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찌감치 춘추시대부터 실패로 판명 났다. 충직한 신하가 되기로 약속했던 제후들이 왕을 능멸하기 일쑤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나서는 일이 예사였기 때문이다. 이는 안전장치가 없는 제도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 또한 제후의 지위에서 천하를 통일한 秦始皇은 약속을 바탕으로 하는 봉건제도라는 것이 믿을 만한 제도가 아님을 인식하고서, 약속이 아닌 힘을 바탕으로 한 제도로 바꾸었다. 臣에게 땅을 떼어주는 것이 아니라 관료를 양성하여 그들을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직접 다스렸던 것이다. 다만 땅이 너무 넓어 전국을 郡과 縣의 두 단계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 방식을 군현제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봉건제도를 都給制로 비유한다면 군현제도는 日當制인 셈이고, 사람에 의한 통치가 봉건제도라면 시스템에 의한 통치가 군현제도라고 비유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보다는 시스템을 위주로 한 진시황의 시도는 성공하였는가. 아니다. 황제의 입장에서 군현제는 포기할 수 없는 제도였지만 황제의 피붙이나 호족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전유하는 땅을 갖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秦이 멸망한 다음 천하를 차지한 劉邦은 개국공신들에게 다시 이전처럼 봉토를 나누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군현제를 유지하였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 정도 봉토를 나누어주지 않을 수 없었기에 史家들은 그것을 郡國制度라고 부르지만, 이는 진시황이 목표한 관료제가 현실적으로는 정착이 불가능했음의 반증이다.(중국사회가 명과 실이 어긋나는 것은 이런 점에서도 역력하다. 지금도 보라. 명분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국가이면서도 실상으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악질적인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곳 아닌가)
이후 중국은 외형상으로는 줄곧 관료제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황제권력이 강할 때 관료들이 약간 득세하기는 했어도 호족과 군벌은 언제나 황제권력의 대척점에서 도사리고 있다가 아예 조정을 인수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곤 하는 것이 중국왕조사의 순환이었다.(거기에 비하면 조선왕조는 5백년이나 관료사회로 유지된다. 그 정도로 우리는 중국에 비해 명분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명분과 이념적 지향을 추구하는 기질이 강해서라기보다는 좁은 땅이라는 환경의 영향이 더 컸다고 본다) 봉건제도를 표방하지 않았음에도 과거 봉건제도하의 부작용이 계속 노정된, 그러니까 봉건제도의 부작용을 한 번도 청산하지 못한 역사인 것이다. 내면화한 부작용 때문에 ‘봉건타도’라는 구호는 20세기 뿐 아니라 요즘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원인을 명분과 실제의 괴리에서 찾지 않고 또다시 봉건제라는 명분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세상을 主從의 질서로 정리하는 봉건제도의 핵심은 무엇인가. 從은 따질 필요 없다. 主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王이 主이면 侯이하 나머지는 從이 되고, 侯가 主이면 公卿 이하 나머지가 從, 公卿이 主이면 大夫 이하 나머지가 從이 되는데, 한번 정해진 主와 從의 위치가 안정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두 번째 핵심은 主의 지위를 대대로 안정되게 물려주는 일이다. 그것은 곧 여러 아들 가운데 누구에게 건네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답을 중국인은 嫡子를 선택하는 것으로 하였다. 밥그릇수를 준거로 삼은 것이다.(밥그릇수는 확실히 가장 이견이 없을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경쟁과 효율이란 것을 생각하면 매우 한심한 방법이다. 고대 중국이 이 방법을 선택한 것은 그 사회의 지배구조가 혈통을 중심으로 한 宗族 중심이었고, 그래서 경쟁이나 효율보다는 안정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적장자가 아닌 나머지는 일괄하여 庶子라고 불렀고, 嫡長子로의 이어짐만이 중시되니 그것을 大宗이라고 불렀다. 宗은 우리말로는‘마루’인데, 가장 크고 높은 것을 의미한다. 얼굴의 콧마루, 산의 산마루,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장 크고 중요한 장소인 마루, 신라왕의 호칭 ‘마립간’ 등이 모두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에서는 그래서 이것을 宗法制度라고 표현하는데, 서자에는 관심 없이 적자인 대종만을 따지는, 즉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지는 것만을 중시하는 이런 관념은 마치 생물학에서 계통을 따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嫡이 아닌 庶는 철저히 무시당하였던 것이다.
嫡庶의 차별은 차가운 소외시키기이다. 개인의 자유나 평등과 같은 근대적 가치와는 정면으로 위배되는 가치이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문화가 아닌가 한다. 불만이 있을지라도 구조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갖지 않는 한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만약 불만을 표현하면 이는 난(亂)으로 규정되어 즉각 응징을 당한다. 하지만 도리어 그 응징을 이기고서 전체를 장악하게 되면 이제 자신이 주가 된다. 마치 생태계에서 본능을 인정하는 것과 유사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난이 생기지 않는 상태가 이른 바 태평성대이다. 그러니까 각자의 계급에 따라 욕망을 극도로 자제하는 상태가 태평성대인데, 그러자면 安分知足이 중요한 덕목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태평성대란 정점의 한 사람이 편안한 상태를 누리는 세월이라는 뜻이다. 누군가 난을 일으켜 안정이 깨지게 되면 단 한 사람 또는 단 한 계층만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전체가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어 그나마 누리고 있는 작은 욕망마저 위협받게 되므로 모두 안정을 희구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작으나마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변화란 늘 두려운 것이 된다. 하지만 이도저도 누릴만한 권리라고는 조금도 없는 계층일지라도 난을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면 유일한 권리라고 할 수 있는 목숨마저 징발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적과 서를 철저히 차별하는 일은 중국에서는 원래 君에서 大夫에 이르는 권력층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넘어와서는 집권층뿐이 아닌 인민 전체의 질서로 강조된다. 나라 전체를 성리학적 질서로 고착시키려 했던 조선조 후반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성리학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이상의 절대 관념, 종교 이상의 숭배체계가 되어 버린다. 주변부의 문화는 이처럼 근원지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양상을 띠는 것이 상례이다. 그 결과 놀부와 같은 인간형이 창조되고 홍길동 같은 인물이 창조된다. 소외자 및 상대적 약자에 대한 무시는 일상화된다. 소실자식을 자식으로 대하지 않고,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놀리며,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열등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자연생태계의 약육강식 질서와 다름없는 비인문적인 행태는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내면화되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소외시키기’ 작업이 권력과는 상관없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에도 깊이 뿌리내린 것이다. 따라서 욕망의 배분이나 이익의 배분에 대한 이성적 판단과 훈련을 반복하지 않는 한 한자문화권에서 인간에 대한 소외시키기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孔孟의 가르침을 오늘날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까지 철저히 준비할 의무가 있다. 인문을 위한 제도가 강화되면 이런 비인문적인 행태가 나타남을 우리는 교훈 삼아야 한다.(진리를 강하게 부르짖는 사람이 실상은 魔性을 강하게 띠고 있음을 "장미의 이름"에서 설파한 움베르또 에코의 생각에 공감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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