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중국의 성어가 있다. 겉으로 표방하는 이름과 실제적인 내용이 서로 부합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문화에는 명실상부가 아니라 겉과 속이 서로 다른, ‘명실상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 그러니까 명실상부라는 말은 중국문화가 만들어낸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반어인 셈이다.
명실상이라고 해서 중국인 개개인이나 중국문화 전반에 이중적인 성격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중적’이라면 ‘선과 악’ 또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양자간의 대립과 갈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대립과 갈등을 빚는 상대성으로서의 명과 실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교묘한 조화를 이루는 안과 밖의 관계를 말한다. 예컨대 중국인들은 정작 A를 말하고자 하면서도 A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B를 말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뜻이 A에 있음을 자기네들끼리는 잘 알아차린다. 이런 것은 문화가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도저히 알아낼 수 없다. 그러니까 A와 B는 결코 같지 않으면서도 절묘한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속에 품은 뜻을 그대로 언명하지 않는 것은 중국인의 언어관습이다. 그들은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 세련된 행동이요, 진솔한 표현은 오히려 미숙한 짓이라고 여긴다. 이는 상대방의 의사를 왜곡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사 또한 오해 없이 전달하면서도, 표면적인 언명만큼은 항상 가변의 여지를 남기는 외교관들의 언어관습과는 다르다.
임어당(林語堂)은 중국인의 특징을 ‘만만디(慢慢的)’라고 하면서 마치 그들이 무척이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처럼 표현했지만, ‘만만디’는 빈틈을 노리고서 긴장한 채 최대한 노리고 있는 것이지 결코 여유로운 태도가 아니다. 최대한 노리고 있다가 상대의 허점이 보일 때 재빨리 달려드는 속도는 중국인들이 세계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장사를 하는 데 있어서도 주고받는 것을 깔끔히 하기보다 이런 자세로써 이익을 취하려고만 할뿐 아니라 그런 자세가 곧 장사의 본질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이런 태도가 떳떳한 태도가 아님은 누구나 인지하기에 중국 전통사회에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하여 가장 낮은 계급으로 천시하였다. 이 얼마나 웃기는 모순인가?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면서도 겉으로는 가장 나쁘다고 표방하니 말이다. 과거 뿐 아니다. 사회주의란 기치아래 자본주의의 모순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장 악성적인 자본주의의 행태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중국이다.
중국문화의 이런 특징이 반드시 나쁘고, 다른 방식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여러 가지 중국적 관습이 과연 현재의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관과 일치하는가에 대한 반성은 절실히 필요하다. 중국식의 이와 같은 관습은 대인관계에서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우선함을 의미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관계에서는 이득을 기준으로 삼아 관계를 맺고, 혈연이나 지연 학연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맺어지는 관계에서는 이득(利得)을 공고히 하고 해실(害失) 확실히 물리칠 수 있는 방식, 곧 세력에 의한 지배를 하고자 한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직접적인 힘이 미치는 곳은 지배를 하려들고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대하여는 표리를 달리하여 이익을 취하거나 우위를 점하려고만 하니, 관념에 입각한 순수한 인간관계란 비집고 들 틈이 없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공공이란 개념, 남을 자기와 대등하게 가치부여를 하고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관념은 거의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요즘도 공중도덕이나 인간존중에 대한 의식이 너무 부족하다. 자기 외의 타자는 철저한 지배의 대상 소유의 대상일 뿐, 두려움의 대상은 있어도 존중의 대상이란 거의 없다.
이는 어쩌면 생물계 일반의, 생명체란 것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서 대등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며, 그렇지 않고 지배하려고만 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공동의 대항을 해야 한다는 것, 즉 인간적 자각과 그것에 바탕한 자존심이란 것을 지니고 살아간다. 이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 자존심에 대해 자각을 하고 공동체 삶의 질을 높이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그에 반하는 관습들에 대하여는 성찰과 변화를 시도해야 할 것 아닌가.
명실상이는 말이 아닌 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천하의 간신일지라도 그가 죽은 다음 비문을 보면 선대의 부귀영화와 태몽부터 시작하여 화려한 벼슬 기록 등 온갖 수식과 찬사가 가득함을 보는 것은 예사이다. 가렴주구에 눈이 먼 지방관일수록 재임중에 자신의 선정비(善政碑)를 아랫사람들에게 강제로 세우게 한다. 그뿐 아니다. 천하의 역적일지라도 임금을 사모하는 시는 잘도 짓는데, 그것은 중국의 시란 것이 진솔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창작이 아니라 다만 어려서부터 그렇게 짓는 법을 익혀서 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경에는 가보지도 않은 사람이 변경을 지키는 군인들의 괴로움을 잘도 시로 표현하는 일이 하등 부끄럼 없이 가능한 곳이 중국이다. 역사기록의 경우 춘추필법이니 사필(史筆)이니 하여 포폄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사필일지라도 조선왕조에서 이루어진 "고려사" 는 이성계를 두둔하고 정몽주를 내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명실상이의 속사정은 바로 이처럼 힘의 상대적 표현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대외관계에 있어 힘이 있을 때는 힘을 곧바로 사용하면 되고, 힘이 없을 때는 명실상이한 표현을 통하여 이익을 얻거나 힘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또 다른 중국적 전통은 ‘미엔즈(面子:체면)’에 대한 중시와 ‘구호(口號)’의 유행이다. ‘미엔즈’란 우리말로 ‘낯’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 ‘낯’은 ‘존경’처럼 남이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힘이 바로 낯이 되니 괜찮지만, 힘이 없을 경우엔 낯을 세우기 위해 몸부림을 치게 된다. 그럴 때 유용한 수단이 바로 구호이다. 중국적 관습의 구호란 이렇듯 어떤 집단의 실천목표라기 보다는 그 집단의 지배자가 자신의 부실함을 극복하고자 하거나 힘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자 할 때 유용한 수단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다. 예컨대 불조심의 필요성을 느끼면 화재를 방지할 구체적인 아이디어와 그 실천력의 준비가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불조심에 관한 구호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글로 적어 걸어두거나 가슴에 달고 다니게 하는 일이 먼저이다. 세월이 지나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노력보다 구호의 기록이 업적의 징표로서는 훨씬 더 유용하기 때문이니, 이런 것 또한 신분제 관료사회에서 길러진 지혜일 것이다. 구호는 입으로 크게 외쳐도 힘을 발휘하게 되고, 글로 써서 붙여도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구호에서 약간 더 진지하고 엄숙하게 나가는 방법으로는 의전을 갖춘 행사이니, 오늘날로 치자면 궐기대회 같은 것과 옛날로 치자면 기우제 같은 것이 바로 그 예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구호는 행정가들이 즐겨 찾는 수단이 되고 있으니, 세계 어디를 돌아 다녀 보아도 우리처럼 일년 내내 표어와 구호로 거리가 뒤덮이는 나라는 중국 밖에 없다. 4월은 식목의 달, 5월은 청소년보호의 달, 6월은 호국원호의 달...이렇게 우리는 이미 외우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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