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의 사상은 당연히 공자의 사유체계를 이어받아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면 공자의 사유체계는 어떤 내용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통치술에 대한 구상입니다. 나라는 어떻게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하고도 옳은지, 어떤 사람이 통치하는 것이 가장 나은지에 대한 모색이 그 줄기입니다.
통치술에 대한 공자의 구상은 『논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논어』 전편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런 사람이 정치를 담당해야 한다.”라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君子’라고 부르면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처신해야 군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평생 언급하였습니다.
우선 ‘君子’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통치자를 가리키는 ‘尹’과, 호령(號令)을 뜻하는 ‘口’를 합한 글자인 ‘君’ 자는 원래 군주를 가리키는 존칭이었습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는 君子를 ‘노예주통치자’(奴隸主統治者)의 이름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귀족 남자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했고, 존경하는 남자, 예컨대 남편을 가리키는 이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공자 당대에도 그런 뜻으로 쓰였습니다. 『논어』 이전의 문헌인 『시경』에서는 세습 군주나 대부, 또는 중의법으로 ‘남편’을 가리켰을 뿐 ‘도덕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곳은 없습니다.
그런 뜻이었던 군자를 공자는 의미를 약간 비틀어서 ‘지배계층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동시에 피지배계층을 가리키던 ‘小人’이라는 말도 군자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공자 사유체계의 틀은 ‘군자 대 소인’의 변증법으로 구성됩니다.
‘군자’라는 이름은 구질서 회복이라는 명분으로써 현실 권력을 쥐고자 했던 공자의 정치적 욕망이 반영된 용어입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아래 계급이 위 계급을 겁박하는 정치 환경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던 시대였습니다.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의 정치 환경도 그랬습니다. 그런 정치 환경을 보면서 성장한 공자는 정치질서를 바로잡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는 제자들을 모아서 가르치면서, 주왕조 초기의 질서가 가장 바른 정치질서라고 강조합니다. 그런 가르침을 펴면서 ‘지배층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로 ‘군자’라는 이미지를 제시한 것입니다. 자신과 제자들처럼 현재의 신분은 비록 경대부와 같은 지배계층은 아니지만 미래 지배계층으로서의 이상적인 인재상을 군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공자는 미래의 모형을 과거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공자는 군자를 어떤 사람으로 설명했을까요?
우선 군자는 무(武)가 아닌 문(文)에 대한 소양을 가져야 한다고 공자는 강조합니다.<고대 중국에서 文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중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그 다음, 『시경』·『서경』과 같은 고전을 익히고, 禮와 樂에 대한 조예를 갖추며, 궁극적으로 仁을 완성해야 군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공자의 사유체계는 君子를 향한 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바람직한 지배계급에 대한 사유입니다. 완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에 대한 사유가 아닙니다.
『시경』·『서경』과 같은 고전을 익히고, 禮와 樂에 대한 조예를 갖추어서, 仁을 완성한 ‘군자’는 어떤 특징을 지니게 될까요? 그에 관한 『논어』의 언급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君子不器”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군자는 그릇처럼 일정한 용도만 갖추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흔히 이 문장을 “군자는 (용도가 제한된) 그릇(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라고 번역하는데, 그런 뜻이려면 ‘君子非器’라고 해야 합니다. 이 문장에서 器는 체언이 아니라 ‘器하다’ 또는 ‘器하려고 하다’라는 뜻의 용언으로 쓰였습니다. 특정한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군자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예컨대 禮에 뛰어나다거나 樂에 뛰어나다고 해서, 말재간이나 일처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군자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공자는 “及其使人也器之(군자가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상대방의 역량에 맞추어야 한다)”(13·25)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거기서의 ‘器’도 사람의 일정한 쓰임새를 측정한다는 뜻입니다. 『역경·계사전』에는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형이상인 것을 도라 일컫고 형이하인 것은 기라 일컫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둘째,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군자는 義를 밝히고 소인은 利를 밝힌다.”라는 뜻입니다. 이 문장에서 義는 ‘모두의 이익’을 뜻하고, 利는 개인의 이익을 뜻합니다. 군자는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사람이지 사적인 이익을 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겠습니다.
셋째, “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군자의 태도는 태연할지언정 교만하지는 않지만 소인의 태도는 교만할지언정 태연하지는 않다.”라는 뜻입니다. 군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풍모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언급일 것입니다.
위와 같은 언급들만 있을 뿐, ‘군자’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전혀 없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을 대할 때마다 “군자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군자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궁리하게 됩니다. 제자가 “이런 사람을 군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라고 여쭈면, 공자는 대체로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군자’뿐 아니라 모든 추상명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껏해야 다른 것에 빗대어 말해주는 정도인데, 그나마도 상황에 따라 설명은 달라집니다. 그런 것이 공자가 의도적으로 취한 가르침의 테크닉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방식은 그대로 유가의 테크닉이 됩니다.
개념에 대해 설명하지를 않으니 후학들은 너도나도 ‘이것이 군자다’라는 설명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바로 주석입니다. 하지만 원전이 분명하지 않거늘 주석이라고 분명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석에 대한 주석이 또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학술사는 주석을 만들어내는 역사가 됩니다. 이런 점은 현대인이 중국의 학술이나 문화를 이해하는 데서 매우 큰 난관이 됩니다. “讀書百遍義自見”(반복해서 읽으면 개념이 저절로 터득된다)이라는 말은 학술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말일 뿐입니다.
유가의 경전들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순자(荀子,313~238BCE)입니다. 순자는 ‘군자’를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스승의 규범을 널리 펴고, 글공부 소양을 쌓으며, 례와 의를 말하는 사람을 군자로 여긴다. 타고난 성정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하는 것을 편히 여기며, 례와 의를 어기는 사람을 소인으로 여긴다(今之人化師法積文學道禮義者爲君子 縱性情安恣睢而違禮義者爲小人).”(『순자·性惡』)
‘군자’를 공자의 언어만 가지고서 정리하자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배움(學)이란 것의 효용을 이해하는 사람, 인생의 즐거움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찾는 사람, 자신의 가치를 남의 인정에 두지 않는 사람.” 이 정의는 바로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스승을 좇아 배우면서 그때그때 익힌다는 것, 그건 참 기꺼운 일 아닌가? 먼 데서도 찾아 와주는 벗이 있다는 것, 그것도 참 즐거운 일 아닌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안달하지 않는 것, 그건 진정 군자의 처신 아닌가?)”라는 『논어』 첫 구절 그대로입니다.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이택후(李澤厚,1930~2021)는 유학을 골간으로 하는 중국문화의 요체는 서양 기독교 문화의 ‘죄책감’이나 일본문화의 ‘부끄러움’과는 다른 ‘즐거움’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세상을 초월하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말하거나 구상하지 않으며, 인간 세상을 떠나지 않고 인간의 감성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을 뛰어넘는 것이 중국의 문화라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일반적인 중국인들이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 예컨대 수(壽)·복(福)·부(富)·귀(貴)와 같은 욕망을 긍정하고 즐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강조했던 군자의 즐거움을 요즘 일반적인 중국인들이 추구하는 즐거움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왜곡입니다. 『논어』 전편에 걸쳐 강조되는 ‘군자’는 지배층에 대한 이름입니다. 고대 지배층의 문화를 지배/피지배의 구조가 무너진 현대 중국인 일반의 문화와 동일시하는 것은 왜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자가 강조한 군자의 즐거움은 전통시대 지배층의 문화를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공자의 관심 대상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평등하다든가,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든가, 인간성을 실현한다든가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 관념들은 근대 이후, 그나마도 바깥에서 들여온 관념들입니다. 근대적인 관념을 가지고 공자를 설명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왜곡입니다. 그런 것이 공자를 숭배하는 일도 아닙니다. 공자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 두고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만 이 시대의 기준으로 평가를 할 수는 있겠습니다.
‘君子不器’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전문적인 능력을 지배계층의 자격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종합적인 교양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공자의 그런 생각은 이후 유교국가에서 줄곧 유지됩니다. 전문지식을 갖추었다고 해서 지배층으로 등용하지 않음은 물론 등용된 지배층에게도 특정한 전문지식을 익히도록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과거를 통해 선발된 관료는 종합적인 교양인일 뿐이었고, 전문적인 업무는 중인계급이 담당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지배층의 책임의식은 낮을 수밖에 없었지요.
공자는 위나라의 령공(靈公)이라는 군주가 매우 무도한데도 위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유를 외교와 례악제도와 군사라는 세 방면에서 뛰어난 대신들이 받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14·19). 뛰어난 인재의 중요성을 그처럼 강조하면서도 외교·행정·군사에 관한 전문적인 능력을 갖추기 위한 교육 시스템에 대해 주의하지는 않았습니다. 국가의 모든 업무를 관료의 종합적인 교양에만 맡기고 법률, 제도, 행정, 같은 것의 전문성에는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H.G.크릴은 공자의 이런 관념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최선의 법률이 다스려야 하는가, 아니면 가장 훌륭한 사람이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성가신 문제’와 대비시키지만, 공자는 양자를 놓고 고민한 적은 없습니다.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이 지배층이 되었을 때 피지배층에게 닥칠 위험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周왕조를 뒤이어 백 대의 왕조를 내려가더라도 그 나라의 제도를 알 수 있다고 장담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제도도 전문적인 제도가 아닌 례악제도를 가리켰을 뿐입니다(2·23). 례악은 변할 까닭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공자의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공자의 그런 생각은 순자에 이르면 보다 분명해집니다. 지배층은 례악으로 규제하지만 피지배층은 준엄한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순자는 강조합니다. 이처럼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세계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이 유가의 존립 기반입니다. 오늘날 유학을 계승하고자 하는 나서는 사람들은 지배와 피지배라는 유학의 존립 기반에 대한 자신의 견해부터 결정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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