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은 요즘 도덕적 품행이나 바람직한 인격을 가리키는 낱말로 쓰입니다. ‘덕이 있다’, ‘덕을 갖추었다’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virtue’의 번역어로 쓰이게 된 이후로는 ‘탁월한 도덕’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교체제 왕조에서 德의 의미는 요즘의 그런 의미들과는 꽤 차이가 있습니다.
갑골문에서 ‘德’ 자는 ‘行’ 자의 중간에 ‘目’ 자가 가로로 누운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行’은 발로 움직이는 동작을 가리키므로, 그 이미지는 ‘올라가다(升)’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간다는 것은 뭔가 얻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얻다’(得)라는 뜻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덕이 되다’라는 말은 곧 ‘득이 되다’라는 말과 동의어였습니다. 나아가 ‘얻게 되도록 만들어주는 행위나 힘’이라는 뜻도 지니게 됩니다. 그것은 곧 통치자의 ‘시혜’(施惠) 내지는 ‘위대한 통치행위’를 가리킵니다. ‘덕을 베풀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렇듯 德이라는 글자는 원래 가치지향적인 뜻을 나타내는 글자가 아니었습니다. 피지배층을 설득하여 지배하려는 수단으로 차용된 정치적 차원의 글자였습니다. 지배권력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설득하려는 개념 가운데 하나가 道라면, 지배권력을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것으로 설계하려는 개념 가운데 하나가 德입니다. 天命이라는 개념으로써 권력의 당위성을 피력하고, 道라는 개념으로써 권력을 원리적으로 설명한 데 견주어, 권력에는 개별적이면서 은혜로운 면도 있음을 설명하려는 수단이 德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명이니 도니 덕이니 하는 낱말들은 모두 정치권력을 설명하는 데 동원된 우아한(?) 개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德이라는 글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哲이나 明 등 정치권력과 유관한 다른 글자들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논어』에서 德은 가치중립적인 의미와 가치지향적인 의미로 모두 쓰입니다. 그래서 일률적으로 ‘성숙한 도덕적 성품’이라고 새기면 곤란합니다. 무언가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점에서 德은 力과 비슷하지만, 성격은 대립합니다. 力은 상대의 의지와 무관하게 상대를 움직일 수 있는 물리적 힘이고, 德은 상대가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선악을 초월한 위력을 가리킵니다. 덕은 은혜나 도움을 주는 행위에서도 생기고, 공동체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능력에서도 생기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덕이 있다는 말은 결국 남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말이 됩니다.
『논어』에서 德은 다음과 같이 사용됩니다.
①후천적으로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품행의 힘. 상덕(尙德:덕을 높임)이니 수덕(修德:덕을 닦음)이니 하는 표현이 그것이다(1·09, 4·25, 6·29, 7·03, 12·10, 12·21, 14·05, 16·01). 德은 가변적이지 않고 꾸준한 것으로 여겼으며(13·22), 尙德과 修德의 방법으로는 남에게서 칭송받도록 처신하는 것이고, 칭송받기 위해서는 베풀어야 한다고 여겼다(16·12). 德은 기본적으로 지배계층의 덕목이지만, 民德이라는 말도 사용된다.
②禮가 통제하는 수단임에 견주어 德은 인도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공자는 덕을 유용한 정치의 수단으로 여겼다.
③仁과 상관관계가 가까운 덕목이다. ‘至仁’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至德’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仁은 완성된 상태에 대한 이름이고 德은 키워가는 것에 대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好仁을 好色과 비유하지는 않지만, 好德은 好色과 비유한다(9·18, 15·13).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덕을 지닌 사람은 훌륭한 말도 남기지만 훌륭한 말을 남긴 사람이 반드시 덕을 지니지는 않는다. 인자는 용기도 지니지만 용자가 반드시 인을 지니지는 않는다)(14·04), ‘先事後得(먼저 섬기고 이득은 나중에)이 德을 높이는 방법’(12·21), ‘先難而後獲(먼저 어려운 일을 앞세우고 이득은 나중에)이 仁’(6·22) 등의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유가에서는 덕을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도덕적 씨앗과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남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스스로 성찰하면 키울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유가 이외 백가의 견해들은 다릅니다. 도가는 덕을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 德을 道와 아울러 ‘도덕’(道德)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장자는 덕을 유가의 性과 비슷한 것으로 여깁니다. 법가는 덕을 사적인 관계에서 주고받는 은혜나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감정으로 여깁니다. 갚아야 하는 빚과 같은 것이므로, 받은 이는 베푼 이에게 의탁하게 된다고 봅니다. 귀족이 인민에게 덕을 베푸는 것은 귀족이 국가 대신 인민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법가는 덕치를 온정주의라고 비판하면서 법치를 주장합니다. 전체주의를 방해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시경』, 『상서』 등 『논어』 이전의 문헌에서는 德이 많이 언급되지만, 『논어』에 이르면 仁이 가장 많이 언급되고 德은 道, 禮, 樂, 知, 學을 언급하는 회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덕이 주왕조 초기에 강조되던 개념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봅니다. 은왕조를 무너뜨리고 주왕조를 세운 군주는 은왕조를 세웠던 상제(上帝, 하늘)의 命이 바뀐 이유를 설명해야 했을 텐데, 그것은 은왕조의 군주가 덕을 잃었기 때문에 상제의 명령이 바뀐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즉, 상제(하늘)의 명령은 불변하지 않으므로 지속적으로 유지하자면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자격의 이름을 덕이라고 말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덕은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자의를 가장한 기만적인 타의로서 고안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기·유협열전』에 나오는 “何知仁義 已饗其利者爲有德(인의 같은 걸 왜 따져? 이익 먼저 챙긴 놈이 유덕자가 되는데)”이라는 문장이나, “竊鉤者誅 竊國者侯 侯之門仁義存 非虛言也(허리띠 훔치면 죽임당하지만 나라 훔치면 후가 된다. 그런 후의 집에나 있는 게 인의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와 같은 문장은 덕을 말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꼬집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서구 윤리학의 'virtue'나 그리스 윤리학의 'arete'를 ‘德’으로 번역하게 된 이후 德을 ‘인간으로서 올바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성품’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의 德은 전통시대의 德과는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자는 “德不孤 必有鄰”(덕은 사람을 외롭게 만들지 않는다. 덕을 지니면 반드시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행하던 성어를 공자가 읊었을 수도 있는데, 공자는 정서적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으로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공자는 언제나 실익에 대해 조언하는 사람입니다. 정주농경문화권인 고대 중국사회에서 공동체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너는 결코 홀로 남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너를 도울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이런 말보다 호소력 있는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덕을 지닌 사람에게 모여들까요? 사람을 모이게 만드는 덕이란 무엇일까요? 『논어』에 그 답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존경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덕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德은 得입니다. 가면 얻을 게 있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유인 요소는 없을 것입니다. ‘덕을 닦는다’(=修德)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남에게) 보탬을 준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德은 결국 ‘관계’에 대한 덕목입니다.
공자는 “驥不稱其力 稱其德也”(천리마라는 이름은 그 말이 지닌 힘에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그 말이 지닌 덕에 붙여준 이름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말이 지닌 덕이란 무엇일까요? 타고난 능력 위에 조련이 잘 된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천리마가 천리마인 까닭은 후천적인 조련이 훌륭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덕은 후천적으로 기를 수 있는 것이라는, 그러니 덕을 기르라는 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천적인 재능을 탓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