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士)를 한국어로는 대개 ‘선비’라고 번역합니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독서인’이나 ‘교양인’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어 ‘선비’는 학식과 고결한 인품을 아울러 갖춘 사람을 가리키지만, 중국사에서 ‘士’의 의미범주는 그것과는 꽤 다릅니다. 士는 유교체제가 갖추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공자도 널리 사용했던 이름입니다. 士를 ‘선비’로 번역하면 文에 치우친 느낌을 줄 뿐 아니라, 공자 시대 士의 의미나 역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士의 성격이 계몽주의 이후에 등장하는 ‘인텔리겐차’와 같다는 견해도 있지만, 인텔리겐차는 실천에 중점을 둔 지식인이라는 뜻이므로 역시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동아시아 역사에서 광범위하게 일컬어졌던 ‘士’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낱말일까요?
‘군자’가 공자가 지향하는 ‘인격’의 이름이었던 데 견주어, ‘사’(士)는 공자가 자긍했던 ‘계층’의 이름이었습니다. 어떤 계층을 가리켰을까요?
원래 士라는 글자는 건장한 남자로서의 조건을 갖춘 무인(武人)을 뜻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대(周代)에 이르면, 문자를 이해하는 계층을 가리키는 이름이 됩니다. 당시 문자를 이해하는 계층이라면 당연히 지배계층이었다고 보아야겠지요. 동시에 관직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던 듯합니다. 그래서 공자 무렵에는 관위(官位)나 학위(學位)와는 관계없이 일정한 직책을 맡은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雖執鞭之士 吾亦爲之”(시장에서 회초리 들고 질서 정리하는 일일지라도 나는 하겠다)(7·12)라는 공자의 말을 보자면 하찮은 일일지라도 일정한 직분을 맡은 남자를 士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스스로의 처신에서는 염치를 갖추고 사절로 나가서는 군주가 시킨 바를 욕되지 않게 해야 士라고 일컬을 수 있다)(13·20)라는 말에서 보듯이 지배계층으로서의 품성과 사명감을 갖춘 사람을 士라고 부르는 것은 여전했습니다. 나아가 경세지도에 뜻을 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공자는 지배계층으로서의 바람직한 인간상을 ‘군자’로 설정하는 한편, 자신과 제자들처럼, 현재 지배계급에 속하지는 않지만 장차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士라고 불렀습니다. ‘군자’가 현존재의 이름이 아니라 ‘지향하는 인물’의 이름이듯이, 士도 현존재의 계급이 아니라 공자가 ‘지향하는 계급’의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새로운 지배계급이 될 것이라는 자긍심을 갖도록 붙여준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공자는 지배계층의 자질 부족으로 인한 국가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군주의 세습은 인정하되 정치 실무는 소양을 닦은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군주에게 재상으로 발탁되기를 기대하였고, 자신의 제자들은 경대부의 가신(家臣)으로 천거하였으며, 자신을 포함한 제자집단의 신분은 士로 자처했습니다. 처음에는 경대부의 족인(族人)을 가리켰지만 계속되는 분족(分族)으로 인해 지배계급에서 배제된 계층을 가리키는 이름쯤으로 된 士에다 공자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대부 가운데 현자를 섬기고, 士 가운데 인한 자를 벗하라”(15·10)는 말을 보면 공자가 士를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일정한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전문 지식인이라는 개념이 士에 추가됩니다. 그리고 진한(秦漢) 무렵에는 대부 아래 계급의 관리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굳어집니다. 어쨌거나 士는 지배계급과 긴장하거나 대립하는 계급을 가리키는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경대부를 돕는 계급으로서, 말단 지배층으로서 인정받고 역량을 발휘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부하던 이름이었다고 봅니다. 장차 얼마든지 신분이 상승할 수 있는 그런 위치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공자의 평생 활동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은 신분 상승을 꾀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사학(私學)과 같은 공동체를 꾸린 일이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런 활동을 최초로 했던 사람이 공자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전해지는 문헌에만 의하자면 분명히 공자가 최초입니다. 공자가 꾸렸던 공동체를 후대에는 편의상 공문(孔門)이라고 부르는데, 그 공동체는 분명 가르치고 배우는 집단이었습니다. 공문의 수업 방식은 일정한 형식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관중(管仲)처럼 현상(賢相)으로 평가되는 유명한 정치인들을 주제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형식이라면 기본적인 형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수업 방식은 공문에서뿐 아니라 이후 등장하게 되는 제자백가에서도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어쨌든 문헌에 의하자면 공자 이후 이처럼 사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집단은 왕성하게 등장했고, 맹자 무렵이면 그런 수업을 닦은 사람의 가치와 권위가 극도로 높아졌으며, 그런 사람들을 士라고 불렀습니다. 그리하여 현사(賢士)의 가치와 양성에 눈을 떴던 제나라 군주는 수도 직하(稷下)에 학궁(學宮)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150여 년 동안 유지하기도 합니다. 사학에서 배출된 현사를 초빙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국가가 현사를 직접 키우는 관학의 단계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국가는 당연히 관학에서 배출된 현사들을 관료로 등용하는 일이 잦았고, 그 때문에 士는 세습직이 지배층 즉, 관료집단이라는 뜻과 동일한 이름이 됩니다.
공자가 누구입니까? 정치를 혁신하고자 했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士로 자처했기 때문에 이후 유교국가에서 士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치 혁신을 자신의 책무로 삼게 되는 전통이 만들어집니다. 이상적인 정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 기존의 정치에 안존하는 사람은 스스로 士라고 부르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士의 개념은 점차 ‘군자’의 개념과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어, 『순자』에는 ‘사군자(士君子)’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중국의 학자들 가운데는 士에 관한 공자의 사상이 평등사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사람이 계급에 관계없이 평등하다거나,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생각은 중국사에서 있은 적이 없습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은 ‘나도 천하를 차지해보겠다’는 뜻이지 내가 왕후장상과 평등하다는 사상에서 나오게 되는 주장은 아닙니다. 공자가 士라는 이름에 집착했던 까닭은 자신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士로서의 자긍심을 강조한 내용들을 보면, ‘군자’나 ‘仁’에 대한 주문과 꽤 겹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志士仁人,無求生以害仁,有殺身以成仁”(바른 도에 뜻을 둔 선비나 인을 추구하는 사람은 제 목숨 살겠다고 인의 가치를 훼손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되고, 제 몸을 죽여서라도 인의 가치를 지켜내겠다는 태도로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士라는 낱말에는 그처럼 원천적으로 정치적 책무가 담겨 있고 정치 혁신에 대한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士는 언제나 도덕적 표준을 자부하는 사람, 혁신을 지향하는 집단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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