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체제란 유교라는 종교를 축으로 삼아 편성된 국가체제라는 뜻입니다. 종교라는 말의 뜻이 ‘으뜸 가르침’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유교의 으뜸 가르침은 어떤 내용일까요? 유교라는 가르침은 天에 대한 관념이 중심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天은 무엇일까요? 하늘이라는 공간? 해와 달과 별들이 움직이는 천체?
天이라는 글자는 갑골문부터 서주시대 금문까지 ‘大’ 자 위에 커다란 동그라미나 네모 또는 가로줄을 그은 모습의 이미지 부호였습니다. 그것들은 커다랗고 특별한 어떤 ‘존재’를 상징하는 기호였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왕의 다른 현존’ 즉, 왕이 죽은 다음 존재하는 형식을 의미했습니다.
왕의 권능에 가장 확실한 위협은 죽음이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권능도 사라진다고 느낀 왕은 두려웠습니다. 늙어 죽더라도 나의 권능만큼은 사라지지 않도록 만들 필요를 느꼈습니다. 누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더욱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관리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스탈린이 죽자마자 후계자 흐루쇼프에게 비판당하는 모습을 본 모택동이 유소기, 팽덕회, 림표와 같은 후계자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핀다면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죽더라도 나의 권능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인식시킬 필요를 느낀 왕은 ‘왕은 죽으면 天이 된다’고 말합니다. 애당초 특별한 어떤 ‘존재’를 상징하는 기호가 ‘하늘’이라는 공간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왕이 天이라는 존재를 말하게 되면서 왕은 육신이 죽더라도 권능은 영원하다는 인식이 모두에게 자리 잡게 됩니다. 왕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일은 헛된 일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죽는 왕은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내 天은 죽은 왕들의 융합체라는 개념이 됩니다. 새로 권좌에 오르는 왕은 죽은 왕들의 융합체인 天이 자신을 보냈다고 말하게 됩니다. 즉, 새 왕은 자신을 天의 아들(=天子)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왕이라는 존재는 天의 자식이면서 天의 명령을 받드는 존재이고, 죽으면 다시 天이 되는 존재로 설정됩니다. 그래서 천자의 옥새에는 ‘受命於天’(天에게서 命을 받음)이라는 문장이 새겨집니다. ‘天子’라는 낱말은 『시경』과 『서경』에도 나오기는 합니다만, 보편적인 일반명사로 사용되는 것은 漢왕조 무렵의 일입니다.
天子는 天의 명령을 받드는 의식절차를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에게 공공연하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권능을 확인시킵니다. 그 의식절차를 제천(祭天)의식이라고 불렀습니다. 天에 대한 祭(제사), 이것이 중국 고대왕조 권력체계의 뼈대입니다. 天에 祭를 올리는 의식절차에서 사용되는 그릇에는 “꾸준히 제사를 지내서 天을 畏(=威)하라”라는 문구가 새겨집니다. 왕이 天을 섬기는 일은 곧 백성이 자신을 섬기도록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天은 이렇듯 왕의 권능을 다지기 위한 사유체계에서 등장한 개념입니다. 차안에서 만든 차안의 개념이었지 피안을 위한, 피안에 관한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차안과 단절되는 피안’이라는 관념을 불교가 들어온 뒤에야 비로소 마주하게 될 뿐입니다.
‘天下’라는 말도 하늘 아래의 공간을 가리키는 역사 지리적 개념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천명을 받은 왕의 권능이 미치는 범주를 가리킵니다. 天 아래 地와 人은 모두 天이 왕에게 내려준 재산으로 설명됩니다. “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넓은 하늘 아래 땅치고 왕의 땅 아닌 곳은 없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치고 왕의 신하 아닌 사람 없다)”(『시·소아·北山』)이라는 말은 그런 뜻을 표현한 시구입니다. 땅과 사람은 모두 하늘이 왕에게 준 소유물이라는 생각은 고대사회 권력자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던 듯합니다.
이렇듯 최고 존엄으로서 天이라는 개념의 등장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등장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상(商)왕조에서 제(帝)라고 부르던 것을 주(周)왕조에서 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학설이 일반적인데, 사실이라면 주왕조 창업주로서는 자신의 권능이 상왕조의 조상들에게서 나온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새 개념과 새 이름을 만들었을 겁니다. 주왕조가 서북쪽에서 내려온 기마민족이라는 점, ‘天’의 발음[tian]이 ‘하늘’ 혹은 ‘하느님’을 의미하는 튀르크의 고어 ‘tängri’와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왕조와 주왕조 사이의 차별성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왕조가 바뀌더라도 피지배층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두 왕조의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元과 淸의 사례를 보더라도 적은 수의 지배층만 교체될 뿐 인민의 삶과 문화는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왕은 천하 사람들이 天에 대한 사유체계를 체화하도록 天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서 퍼뜨립니다. 그런 기제는 신화를 퍼뜨려 권력을 확보했던 서구문화권의 기제와 기본적으로 비슷합니다. 서구문화권에서 권력자는 神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를 만들어 보급하지만, 중국에서 천하를 장악한 왕은 역사책을 새로 씁니다. 현재만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도 장악하고 미래도 장악하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새 역사책은 언제나 이전의 것보다도, 물론 실제보다도, 훨씬 리얼하게 꾸며집니다. 역사책뿐 아니라, 중국의 기록물치고 정치권력과 무관한 것은 없습니다.
문명사학자들은 원시종교가 집단 구성원의 내부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생겼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내부 결속력이라는 표현은 주권을 가진 대등한 개인들이 전제될 때 가능한 표현일 것입니다. 다신교이든 일신교이든 관계없이 모든 종교는 권력자의 지배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관념체계로서 등장한다고 봅니다. 안정된 질서를 추구하려는 생각이 만든 관념체계인 것입니다.
왕이 천명을 받는 의식인 祭는 매해 왕의 가장 큰 임무가 됩니다. 중국의 제사는 이렇듯 ‘왕의 제천(祭天)의식’에서 출발된 것입니다. 天에 祭를 올릴 자격을 가진 사람을 적(嫡)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당연히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릴 자격을 가진 사람을 모두 적자(嫡子)라고 부르게 됩니다. 왕조를 멸망시키더라도 왕의 후손이 조상에 대한 제사는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관행이 만들어졌던 것은 앞 왕조의 조상신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을 겁니다. 天에 대한 개념이 보편화하면서 신(神)이나 귀(鬼)도 공대해야 한다는 관념이 보편화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왕을 제외한 지배층은 자신도 죽은 뒤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였을 것이고, 그 결과 기후현상을 나타내는 글자인 神을 자신의 조상신과 동렬의 존재로 간주했던 듯합니다. 그리하여 왕이 아닌 지배층도 각자 자신의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받들고자 하는 관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관념은 당연히 피지배층에게까지 점차 내려가게 됩니다.
왕은 제천의식을 통해 정기적으로 받는 천명과는 별도로 자신이 수시로 수행하는 통치행위도 천명이라고 말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때마다 능동적으로 천명을 묻는 절차를 시행하였으니, 그것이 점(占)입니다. 왕의 권능은 제사를 통해서 확보되고, 점을 통해서 행사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점을 친 결과, 즉 천명의 내용은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권위를 위해서도 기록해두었습니다. 왕조국가의 행정문서와 같은 성격이었던 것이지요. 중국의 문자는 그러한 필요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인민이 생활하는 가운데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수단이 아닙니다.
天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지만, 공자 당대부터 복합적인 개념이 됩니다. 하늘이라는 공간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네 계절을 돌리는 일에, 만물을 생육하는 일에,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17·19)에서처럼 인격신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其中 四海困窮 天祿永終(하늘이 정한 군주의 순서는 이제 너에게 있으니 신실하게 중심을 잡아나가거라. 그러면 그 덕화가 이 땅의 끝까지 이르게 되고 하늘이 내리는 녹은 길이 이어질 것이다)”(20·01)에서처럼 원리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天道’(5·12)라는 말도 쓰이게 됩니다.
왕의 권능이 天의 명령에 기반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레 天의 명령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도 만들어냅니다. 혁명(革命:천명이 바뀜)이 그것입니다. 왕조를 무너뜨리거나 왕위를 빼앗는 사람은 천명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은왕조를 무너뜨리고 주왕조를 창업한 사람이 처음 그런 개념을 만들지 않았을까 합니다.
공자 이후로 천명은 민의를 매개로 해서 전달된다는 생각이 퍼지게 됩니다. 예컨대 맹자는 민에게서 신뢰를 얻어야 천자의 자격이 있다면서, 능동적인 혁명을 강조하는 정치사상을 펴기도 합니다. 한편 왕위를 세습하지 않고 현자에게 이양한다는 ‘선양’이라는 관념도 ‘혁명’이라는 관념과 더불어 생겼을 것입니다.
이처럼 왕의 권력구조를 天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사유체계가 바로 유가사상입니다. 그런 사유체계를 통일되게 정리한 사람이 공자인데, 이후 그러한 사유체계는 정치사상으로 계속 진화합니다. 자사(子思)와 맹자를 거치면서 天에 대한 강조는 더욱 고조되고, 한(漢)의 동중서(董仲舒)는 왕이 도리를 벗어난 짓을 할 때 천이 곧바로 명을 바꾸지는 않고 미리 경고한다는 이른 바 천견설(天譴說)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유가적 사유체계를 반대하면서 일어난 도가나 법가는 天에 대한 개념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예컨대 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무런 까닭이 없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는 내린다. 일식 월식이 생기면 제사를 지내고,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고, 점을 친 다음에야 대사를 결정하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이룰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렇게 꾸미는 것이다. 군자는 그렇게 꾸민다고 이해하지만 백성은 신령하다고 여긴다.”(『순자·天論』) 天을 군주의 의지나 욕망과 연결되는 존재가 아니라 규칙성을 지니는 자연현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임의로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고정된 리(理)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天에 대한 인간의 자세도 그저 天에게 빌기만 할 것이 아니라 대비하자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天道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논어』에 나오는 것을 보면 그 기원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봅니다. 천연(天然)이니 자연(自然)이니 하는 말도 그런 생각에서 나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왕의 권능을 더는 天에 의탁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왕의 권능도 리(理)로써 설명하게 됩니다. 그런 변화는 이미 『상서』에서부터 보이는데, 도가와 묵가를 거쳐 동중서(董仲舒)에 이르러 체계화한다고 봅니다. 천인감응(天人感應)이니 천인합일(天人合一)이니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 무렵 우주의 움직임을 원리로써 설명하려는 역(易)이라는 이론도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제 왕뿐 아니라 누구나 天을 바라보고, 天에 의지하며, 天을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참 뒤 주희(朱熹,1130~1200)와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天卽人 人卽天(하늘이 곧 사람이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이라고까지 말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주희의 리학은 인간의 위치를 높인 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人乃天(사람이야말로 하늘이다)’을 부르짖은 동학도 인간의 가치를 높인 사유체계였다 할 것입니다.
天을 중심으로 하는 유가사상을 이해하자면 禮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그밖에 仁 義 忠 孝 信 등 공자가 언급한 여러 덕목들에 대한 이해도 필수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獲罪於天 無所禱也”(3·13),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6·28), “吾誰欺 欺天乎”(9·12), “天喪予 天喪予”(11·09), “富貴在天”(12·05), “不怨天 不尤人”(14·35),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17·19) 등 『논어』에 나오는 표현들을 이해하는 것도 도움 됩니다.
유가의 천하관(=天을 중심으로 한 사상체계)은 淸왕조 말기에 서구 문물이 중국을 휩쓸면서 비로소 바뀌기 시작합니다. 1898년 엄복(嚴復,1854~1921)이 헉슬리의 논문을 바탕으로 사회진화론을 소개한 『천연론(天演論)』과 같은 책의 영향이 컸습니다. 천하 대신 국가를 생각하고 자기 한 사람 대신 국가를 생각하자는 양계초(梁啓超,1873~1929)의 주장도 영향이 컸습니다. 요사이는 국가와 민족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내셔널리즘으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왕 대신 당(집권 공산당)으로만 바뀌었을 뿐 사유의 틀은 유교체제의 천하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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