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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中國佛敎 聲唱의 流變

by 曺明和 2021. 7. 31.

=====目 次=======

 

1. 中國佛敎 聲唱起源과 종류

(1) 法苑珠林의 설명

(2) 高僧傳의 설명

2. 轉讀의 발생과 소멸

(1) 轉讀이란 무엇인가

(2) 梵唄와 구분되는 轉讀에 관한 기록들

3. 梵唄의 탄생과 그 流別

(1) 범패의 탄생

(2) 범패의 流別

(3) 범패소리의 특징

 

 

1. 中國佛敎 聲唱起源과 종류

 

  문학이나 예술의 기원이 인간의 종교행위에 있다고 믿는 것은 학계의 보편적인 합의인 듯하다. 그리고 종교행위는 인간의 예술과 문학을 점화하는 데만 그치지 아니하고 인류사에서 내내 예술과 문학에 풍부한 영양을 계속 공급하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를 보자면 문학과 예술은 유교가 국교의 자리를 차지하면서부터 비로소 풍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중국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 이를테면 중국의 종교는 물론 정치와 사회 예술 및 문화일반은 유교가 국가이념이 된 다음인 漢代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유교는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유교보다 더 중국에 고루 그리고 많이 영향을 미친 종교는 없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유교는 다른 어떤 종교국가의 종교보다 더 가혹하게(?) 중국의 인민을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중으로부터 스스로 생겨난 종교가 아니라 지배자의 입장에서 민중에게 강요된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였기 때문에 왕실이나 사대부의 예술과 문학에 있어서는 밑받침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대중적인 유행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이나 문학에 있어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 망하고 대륙은 남북으로 갈리어 漢族異民族간의 전란이 계속되는 혼란기가 되자 그 무렵에 마침 불교는 중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혼란기에 마주치게 된 불교는 유교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관 즉, 來世觀이란 것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도탄에 빠진 중국의 인민들로서는 순식간에 외래 종교인 불교의 목소리에 경도되었다. 그렇게 되자 중국의 문학과 예술 또한 당연히 새로운 밑거름을 얻게 되었다. 불교를 전파하러 들어온 西域僧들은 한편으로는 王室의 힘을 빌어 불교의 가르침을 펴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제신앙개인의 각성을 내세우는 大乘佛敎의 교리를 인민들에게 직접 다가가서 가르치는 기회를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중국의 인민들은 이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자아의식이란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즉 전쟁만을 일삼던 살벌한 분위기, 전쟁이 끝난 뒤 강력한 전제왕권의 공포적인 분위기에만 익숙해 있다가 함께 이상사회로 나아가자고 호소하는 대중적인 집회라는 것에 중국의 인민들이 익숙하게 되었으니, 대중적인 집회란 곧 사람들에게 정치적 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예술의 발생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지배권력은 전제권력의 속성상 불교교단이 지배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커다란 힘을 갖는 존재가 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제 중국의 불교교단은 자신의 존립기반을 민중에 두려 하기보다 왕실로부터의 外護여부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배권력은 그렇다 하더라도 민중의 입장에서 불교는 어쨌든 신선한 매력을 주는 새로운 종교였다. 그리고 불교에 대항하여 새롭게 조직을 한 道敎 또한 민중들이 유교보다는 훨씬 더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교단이 흥륭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일게 되는 불교예술과 불교문학은 중국의 예술과 문학에 직접 간접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실로 중국의 예술과 문학은 불교의 교세가 전중국을 뒤덮게 되는 육조시대를 계기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서양의 기독교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까지 근 천여년 동안 중국의 문화사에서는 불교의 전래만큼 비약적인 발전과 변화를 주는 계기는 나타나지 않게 된다. 우리가 중국의 예술이나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예술과 문학, 또는 불교를 매개로 하여 들어온 인도와 서역의 문학과 예술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本考는 위와 같은 배경의 인식에 따른 중국불교문화의 연구 일환으로 중국불교 교단 안에서 聲唱이 어떻게 생겨나고 발전하며 또 어떻게 변화해가는 가에 대해 살피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의 聲唱이란 중국불교에서 사용되는 頌讚聲樂, 節奏에 맞추어 부르는 독특한 經典讀誦法, 그리고 대중모임에서 소리와 창을 바탕으로 극적인 연출을 하는 唱導 등의 분야를 포괄하여 지칭한 용어이다. 다시 말하자면 순전한 器樂을 제외한 소리()와 노래()가 들어간 불교의 모든 음악을 총칭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계의 다양한 聲唱은 단순히 불교교단 내부의 文藝현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音樂, 그리고 講唱과 같은 문학에까지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불교 성창들의 변화과정과 상호영향관계는 충분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本考에서 다룰 중국불교 성창의 범주는 頌讚聲樂으로서의 梵唄’, 경전을 읽는 독특한 讀誦法으로서의 轉讀’, 그리고 일종의 唱劇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唱導의 세가지이다. 현존하는 중국불교의 고대자료에 의하면 이 세가지 외에 다른 종류의 성창이 있기는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이 세가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본격적인 성악으로 보기에는 미흡하기도 하여 제외하였다. 이 세 종류의 성창은 남북조시대에 각각 발생하여 발전하게 되지만 기록수단이 없는 이 장르의 특성상 변모 내지 소멸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 나중에는 독자적인 특성을 잃게 되거나 사라지기도 하고, 후대의 사람들은 원래의 이름조차 혼동하여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즉 경전의 독송법인 전독은 일찍부터 범패와의 구분이 사라지는 듯하고, 창도의 경우는 梵唄僧唱導僧을 겸하게 되면서 三者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는 듯하다. 즉 그것의 수단이 모두 목소리이기 때문에 결국 한 가지를 잘하면 다른 것도 잘할 수밖에 없어 자연히 세 가지 사이에도 구분이 없어지는 듯하다. 그러면 우선 이 세 가지 종류 성창들의 기원과 성격을 가장 확실하고도 중요한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法苑珠林의 설명

 

  法苑珠林나라의 道世(?-683)668년 불교에서 사용되는 法數나 술어 100가지를 선정하여 668로 나누어 백과사전식으로 개념을 서술하여 펴낸 책이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있어서 불교와 관련된 정확한 지식을 얻는데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는 자료인데, 唄讚篇述意部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夫褒述之志寄在詠歌之文 詠歌之文依乎聲響 故詠歌巧則褒述之志申 聲響妙則詠歌之文暢 言詞待聲相資之理也 尋西方之有唄 猶東國之有讚 讚者 從文以結音 唄者短偈以流頌 比其事義 名異實同 是故經言 以微妙音聲歌讚於佛德 斯之謂也--(중략)-- 若夫稱講聯齋衆集 永久夜緩晩遲香銷燭揜 睡蓋覆其六情 懶結纏其四體 於是擇妙響以昇座 選勝聲以啓軸 宮商唄發 動玉振金 反折四飛哀悅七衆 同迦陵之聲 等神鸞之響 能使寐魂 更開惰情還肅 滿堂驚耳 列席歡心 當爾之時 乃知經聲之爲貴矣(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지닌 뜻을 표현하고자 할 때는 노래의 가사에 기대어 표현하는 법이고, 노래의 가사란 또 목소리에 의지하여 전달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노래의 가사가 좋아야 속마음이 잘 표현될 수 있고, 부르는 목소리가 좋아야 노래의 가사 내용이 잘 드러날 수 있으니, 노래가사와 목소리와의 관계란 서로 돕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서방의 패란 것을 깊이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찬과 비슷한데, 우리나라의 찬이란 韻文규칙에 따라 음운을 엮어 나가는 것이지만, 패는 짧은 偈頌을 길게 이어 부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 두 가지의 내용과 의의를 견주어 보자면 이름만 다를 뿐 실제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전에 미묘음성으로 부처님의 덕을 가찬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 --(중략)-- 講經會에나 齋會 같은 여러 사람이 모인 행사에서 밤이 깊어 향과 촛불이 사그라질 즈음이 되면 졸음과 지루함이 온몸과 마음을 짓누르게 되는데, 이럴 때 목소리가 좋은 승려에게 고좌에 올라 좋은 범패소리 한 곡조를 골라서 뽑게 한다. 그러면 그가 부르는 금옥이 구르는 듯한 소리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 모인 사람들을 감동시키게 되는데, 그 소리란 마치 迦陵頻伽神鸞의 소리와 같다. 그 소리는 능히 잠을 쫓을 뿐 아니라 지루한 마음도 사라지게 하여 좌중을 엄숙하게 할 뿐 아니라 모두 기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경전을 노래하는 성악의 효능이 귀중함을 깨닫게 된다)

 

  이상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도의 는 중국의 과 내용적으로는 비슷하다는 것과 둘째, 양자의 다른 점으로는 從文以結音(운문을 엮는 규칙에 따라 한 글자씩 엮어나가는 것)’하고 短偈以流頌(짧은 게송을 길게 이어서 송찬하는 것)’하는 점일 뿐이라는 것이며 셋째, 이런 唄讚의 효용은 대중모임에서 졸음을 쫓고 분위기를 엄숙하게 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내용은 (2)에서 설명하게 될 󰡔高僧傳󰡕의 내용을 道世가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일 뿐 별달리 새로운 설명이 없다. 다만 마지막 부분에서 道世唄讚經聲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 주의를 끈다. , ‘經聲이라면 경전을 가락 붙여 낭송하는 소리라는 뜻인데, 道世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經典文句를 낭송하는 성악이 아니라 경전이 아닌 따로 지은 讚文을 성악으로 부르는 讚唄를 설명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것의 이름을 經聲이라고 표현한 것이 약간 이상하다는 것이다. 道世의 문장이 워낙 심한 騈儷體이기 때문에 앞에서 설명한 찬패를 뒤에서 다시 언급할 때 와는 다른 문자로 표현코자해서 경성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라면 별달리 주의할 필요가 없겠지만, 아무리 같은 의미를 다르게 표현코자 하는 修辭上의 의도에서 그렇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를 함부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道世가 경전의 낭송과 찬문의 성악을 같은 성격의 것으로 오해했거나 아니면 道世 당시는 이 두가지에 이미 구분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리할 수 있는데, 아마도 후자이리라 생각된다. 왜냐면 慧皎󰡔高僧傳󰡕에서 經典을 읽는 방법인 轉讀讚文을 노래하는 방법인 梵唄가 엄연히 따로 있었음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法苑珠林 唄讚篇讚歎部에는 또 다음과 같은 설명도 있다.

 

漢地流行 好爲刪略 所以處衆作唄 多爲半偈 故毘尼母論云 不得作半唄 得突吉羅罪 --(중략)-- 至於宋朝 有康僧會法師 本康居國人 博學辯才 譯出經典 又善梵音 傳泥洹唄 聲製哀雅 擅美於世 音聲之學 咸取則焉 又昔晉時有道安法師 集製三科 上經上講布薩等 先賢立制 不墜於地 天下法則 人皆習行 又至魏時 陳思王曹植 --(중략)-- 植每讀佛經 輒流連嗟翫 以爲至道之宗極也 遂製轉讚七聲 昇降曲折之響 世人諷誦 咸憲章焉 嘗遊魚山 忽聞空中梵天之響 淸雅哀婉 其聲動心 獨聽良久 而侍御皆聞 植深感神理 彌悟法應 乃摹其聲節 寫爲梵唄 纂文製音 傳爲後式 梵聲顯世 始於此焉 其所傳唄 凡有六契(중국에서는 간략하게 줄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대중 앞에서 唄讚를 부를 때도 게송을 다 부르지 않고 절반만 부른다. 그래서 비니모론에서도 반패로 하면 안된다, 만약 반패로 하면 돌길라죄를 얻게 된다라고 했다. --(중략)-- 南朝의 송나라 때에 강승회라는 법사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강거국 사람으로서 박학하고 말주변이 좋았으며 여러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는 또 인도음악(범패)에도 밝아서 니원패를 지어서 남겼는데, 그 소리는 애처롭고 우아하여 당세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이후 범패성악은 모두 그것을 준칙으로 삼게 되었다. 또 진나라 때에는 도안법사라는 이가 상경 상강 포살의 三科를 모아서 만들었는데, 그가 만든 제도는 천하의 법칙이 되어 후세 사람들이 모두 그 法式을 익혀서 행하고 있다. 또 위나라 때에는 진사왕 조식이 나왔는데 --(중략)-- 조식은 불경을 읽을 때마다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도의 宗極이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마침내 전독 일곱 소리를 만들었는데, 오르고 내리며 굽고 꺾이는 그 소리를 세인들은 모두 따라서 불렀고, 마침내 그것이 변할 수 없는 법식이 되었다. 그는 또 언젠가 어산에 놀러 가서 이런 일을 경험하였다. 갑자기 공중에서 하늘나라(범천)의 소리가 들려오는데, 맑고 우아하며 애처롭기도 하고 완약하기도 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자 혼자서 한참 동안을 듣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 소리를 들었다. 조식은 신령한 이치에 깊이 감동되어 불법의 감응을 더욱 깨닫게 되었고, 이에 그 소리를 본떠 범패를 만들었으니 그가 지은 歌詞나 음악은 후세의 법식이 되었다. 세상에 범패라는 것이 나타나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그가 전한 범패는 모두 여섯 가 된다)

 

  이 대목에서는 범패의 발생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曹植의 경우만 분명하게 그가 범패를 처음 만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을 뿐 道安이나 康僧會의 경우 이들이 중국불교 성창의 발생이나 발전에 기여한 구체적인 공적을 분명하게 표현한 바는 없다. 그리고 내용 또한 고승전에 비하여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 위에 인용한 두 대목은 법원주림의 성창관계 기록으로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찬술시기가 더 이른 고승전보다 새로운 내용이 없다면 이전의 자료로는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기대되는 법원주림에서는 중국불교의 성창이 어떻게 발생되고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아내기가 힘들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법원주림보다 먼저 편찬된 중요사료인 고승전을 살피는 도리 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중국불교의 聲唱에 대하여 고승전보다 더 이른 자료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2) 高僧傳의 설명

 

  고승전은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後漢 永平10(67)부터 梁 天監18(519)까지 453년에 걸쳐 활동한 승려 257인의 行狀나라의 慧皎(497-554)가 기록한 것인데, 이전의 자료를 총망라했을 뿐 아니라 혜교의 높은 안목으로 인해 불교자료로는 물론 역사사료로서의 정확도로도 매우 인정받고 있는 저작이다. , 書名은 비록 僧傳이라고 하였지만 내용만큼은 다양하여 當代까지의 불교사 및 문화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승려들의 주된 활동을 주제로 삼아 10개의 科目으로 나누어 傳記를 서술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일곱번 째 과목인 誦經과 아홉번 째 과목인 經師’, 그리고 열번 째 과목의 唱導가 바로 聲唱과 관계되는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셋 가운데서 誦經의 경우는 대개 아무개 승려가 어떤 경전 諷誦하는 것을 평생 업으로 삼아 이러이러한 기이한 행적을 보였다는 내용만 있을 뿐 풍송의 방법이나 소리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어서 본고에서 주목하는 성창에 관한 정보를 얻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나머지 두 과목에서 주로 찾아볼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먼저 권13 經師第九論曰의 설명에서 성창에 관한 기본개념을 살펴 보자.

 

夫篇章之作 蓋欲申暢懷抱 褒述情志 詠歌之作 欲使言味流靡 辭韻相屬 故詩序云 情動於中 而形於言 言之不足故詠歌之也 然東國之歌也 則結韻以成詠 西方之讚也 則作偈以和聲 雖復歌讚爲殊 而並以協諧鍾律 符靡宮商 方乃奧妙 故奏歌於金石則 謂之以爲樂 設讚於管絃則 稱之以爲唄 夫聖人制樂 其德四焉 感天地通神明 安萬民成性類 如聽唄 亦其利有五 身體不疲 不忘所憶 心不懈倦 音聲不壞 諸天歡喜(무릇 散文으로 된 篇章같은 글은 대개 가슴속에 품은 생각이나 느낌이며 뜻을 펴내 보이고자 하는 것이고, 韻文으로 된 詠歌와 같은 것은 말의 맛을 유창하게 만들고자 修辭音韻으로써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毛詩序에서도 감정이 心中에서 움직여 가지고 말로 나오는 법인데, 말로써 충분하지 않으므로 노래를 하게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라는 것은 을 맺어 가지고 을 하는 것임에 비하여 서방의 이라고 하는 것은 를 지어서 和聲을 하는 점이 다르다. 그런데 우리의 가와 서방의 찬이 비록 그런 점이 다르다고는 해도 두 가지 모두 鍾律같은 音階와도 맞추어야 하고 宮商같은 音調에도 맞추어야 오묘한 지경에 이르게 됨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악기에 맞추어 를 연주하는 것을 이름하여 이라 하고, 악기에 맞추어 을 베푸는 것을 이름하여 라고 하는 것이다. 성인께서 을 만드시면서 음악의 덕은 네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천지를 느낄 수 있고 신명에 통할 수 있으며 만민을 안정시킬 수 있고 성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범패를 들어도 이로움이 다섯 가지나 되는데, 신체가 피로하지 않게 되고 기억한 것을 잘 잊지 않게 되며 마음이 권태롭지 않게 되고 음성이 어그러지지를 않으며 하늘이 기뻐하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와 서방의 은 비슷한 것인데 다만 중국의 結韻以成詠하는 방식임에 비해 인도의 作偈以和聲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비록 두 가지가 성격이 그렇게 다르다고는 해도 악기 반주에 실어서 부르는 점은 같은데, 그렇게 악기반주에 실어서 부르는 것을 중국에서는 이라 하고 인도에서는 라고 하는 점이 차이일 뿐이다. , 중국에서 詩歌를 악기의 반주에 실어 노래부르는 것과 같이 범패란 인도의 시가라고 할 수 있는 偈頌을 악기의 반주에 실어 노래부르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법원주림尋西方之有唄 猶東國之有讚 讚者 從文以結音 唄者短偈以流頌 比其事義 名異實同이란 설명은 오히려 고승전의 설명보다 덜 분명한 셈이다. 그리고 법원주림에서는 대중적인 집회에서 성창의 효용이 있다고만 설명하였는데, 이에 비하여 혜교는 유교에서 중시하는 樂敎四德과 비유하여 범패의 효용을 다섯가지라고 명시하고 있는 점도 더 명쾌한 설명이다.

 

  이 밖에도 고승전에는 성창의 기원에 대하여도 어느 자료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을 뿐 아니라,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경전을 낭송하는 방법인 轉讀讚文을 낭송하는 방법인 梵唄가 원래 구분되어 있었음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성창의 능력을 바탕으로 하여 대중적인 집회에서 상당한 효용이 있는 唱導라는 것을 한 科目으로 두어 소개하고 이에 능한 승려들의 전기를 싣고도 있는데, ‘전독창도라는 과목의 명칭은 고승전을 이어서 唐代道宣(596-667)이 편찬한 續高僧傳에도, 그리고 뒤이어 宋代贊寧(930-1001)이 편찬한 宋高僧傳에도 나와 있지 않다. , 후속의 僧傳들은 經師科唱導科를 아예 삭제한 다음 雜科聲德이란 科目名으로 성창에 관한 기록들을 한데 담고 있을 뿐이다. 이는 혜교 당시에 분명하게 구분되었던 唱導僧經師僧唐代 쯤이면 구분이 없어졌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까 앞서 법원주림에 오히려 고승전보다 새로운 내용이 없었던 것은 법원주림이 오히려 속고승전보다 후대에 편찬되었음을 감안한다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성창에 관한 과목명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唐代에는 혜교의 시대에 비해 불교의 성창이 매우 소홀하게 다루어졌거나, 아니면 각 부류의 성창들이 나름대로의 특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함부로 섞이게 되어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현시점에서 중국불교 성창의 기원과 종류들을 살피려면 고승전이 가장 적합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속고승전 송고승전고승전의 후속이기 때문에 고승전과의 비교를 통하여 중국불교 성창의 변화과정을 확인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러면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전독과 범패 및 창도에 관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2. 轉讀의 발생과 소멸

 

  (1) 전독이란 무엇인가

 

  轉讀은 위에서 살핀대로 불교경전의 문구를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節奏에 맞추어 낭송하는 방법을 말한다. 慧皎의 설명에 의하면 인도에서는 불교의 經典을 그저 소리나는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써 歌唱하는 음악이 있어 그 음악에 맞추어 부르는 것이 상례였으나 중국으로 들어와서는 경전의 내용만 漢譯하였지 낭송하는 방법은 전달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도의 음악에다 중국음으로 가창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인데, 그래서 한자음으로 된 불교경전을 가창하는 방법을 조식이 창안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전독이라고 한다. 그러면 혜교의 설명을 직접 살펴 보자.

 

自大敎東流 乃譯文者衆 而傳聲蓋寡 良由梵音重複 漢語單奇 若用梵音以詠漢語 則聲繁而偈迫 若用漢曲 以詠梵文 則韻短而辭長 是故金言有譯 梵響無授 始有陳思王曹植 深愛聲律 屬意經音 旣通般遮之瑞響 又感魚山之神製 於是刪治瑞應本起 以爲學者之宗 傳聲則三千有餘 在契則四十有二 其後帛橋支籥 亦云祖述陳思 而愛好通靈 別感神製 裁變古聲 所存止一十而已 至石勒建平中 有天神降于安邑廳事 諷詠經音 七日乃絶 時有傳者 並皆訛廢 逮宋齊之間 有曇遷僧辯 太傅文宣等 並殷勤嗟詠 曲意音律 撰集異同 斟酌科例 存倣舊法 正可三百餘聲 自玆厥後 聲多散落 人人致意 補綴不同 所以師師異法 家家各製 皆由昧乎聲旨 莫以裁正(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온 이래 경전의 문구를 번역한 사람은 많았지만 경전 읽는 소리를 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인도어는 중복음이고 한어는 단음이어서 인도의 음곡에다 한어로 된 가사를 읽게 되면 소리는 남지만 가사인 게송이 부족하게 되고, 중국의 음곡에다 인도어의 가사를 읽게 되면 소리는 짧고 가사는 길게 되어 어떻게 하든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은 漢語로 옮겨졌어도 그것을 읽는 인도식의 音曲은 전수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陳思王 曹植(192-232)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는 본디 聲律을 매우 좋아한데다 불교경전을 읊는 소리에도 관심이 깊었다. 그리고 般遮의 상서로운 음곡에도 정통한데다 어산에서 신령한 음곡에 감동받은 일이 있자 이에 󰡔瑞應本起經󰡕을 다듬어 음곡을 만들어 이 방면을 배우는 사람들의 宗師가 되었다. 그가 남긴 소리는 삼천여 가지가 되고 로는 四十二契가 되는데, 그후 帛法橋支曇籥이 이어 나와서 陳思王(曹植)祖述하게 되었다. 그들 또한 靈感에 통달하기를 애호하여 진사왕과는 별도로 天神에 감화받아서 새로 만들기도 하고 예전의 음곡을 다듬어서 바꾸어 놓기도 하였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십분의 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至石勒建平中 有天神降于安邑廳事 諷詠經音 七日乃絶 時有傳者 並皆訛廢 逮宋齊之間 有曇遷僧辯 太傅文宣等 並殷勤嗟詠 曲意音律 撰集異同 斟酌科例 存倣舊法 正可三百餘聲 自玆厥後 聲多散落 人人致意 補綴不同 所以師師異法 家家各製 皆由昧乎聲旨 莫以裁正 石勒氏나라 建平年間(330-333)天神安邑의 관청에 내려와 佛經 소리 읊기를 칠일간이나 하다가 그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 소리를 받아서 전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걸쳐서는 曇遷僧辯 文宣王 등이 모두 이것을 좋아하여 악곡과 음률에 있어 서로 다른 것들을 모아 가지고 종류별로 분류를 하여 옛날의 법식을 보존하였으니, 그 숫자는 삼백여곡이나 된다. 그러나 그 사람들 이후로는 聲唱들이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후 이것에 뜻을 두고서 흩어진 것을 보충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보충하는 사람마다 각각 내용이 달랐기에 經師마다 법식도 다르고 악곡도 달라지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성악의 旨趣에 대하여 모르는데서 비롯한 것으로써 아무도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단음절어인 漢語는 굴절어인 산스크리트와 맞지 않기 때문에 산스크리트 가사를 실어서 부르는 인도음악에다 漢譯 經典 가사를 실어서 부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음악에 실어 부르지는 아니하고 그저 읽기만 했다. 둘째, 그러다가 漢譯 경전의 중국식의 독송법을 曹植이 창안하였다. 그는 般遮라고 하는 인도의 음악에도 통하고 또 魚山에서 神聲을 얻어들은 다음 그것을 본뜨기도 하여 비로소 새로운 독송법을 만들었으니 소리의 종류는 3천여 가지이고 로는 42가지였다. 셋째, 曹植의 뒤로 帛法橋支曇籥이 그 독송법을 이어서 새로운 소리를 계속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후대에 잘 전해지지는 않아서 십분의 일도 안 남게 되었다. 넷째, 宋齊間에 이르러 담천과 승변 및 문선왕 등의 노력으로 3백여이 정리된 적이 있지만 그들 이후로는 이 방면의 전문인이 없어져 전독법은 마침내 흩어지게 되었다.

 

  續高僧傳을 지은 道宣이나 法苑珠林을 지은 道世 등은 이 전독법을 범패와 동일한 것으로 혼동한 듯하다. 그래서 이 두 책에는 唄讚또는 梵唄라고 불리우는 聲樂 만을 聲唱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할 뿐 경전을 낭송하는 방법으로서의 轉讀에 대하여는 설명하고 있지 아니하다. 그것은 위의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이미 南朝에서부터 전독법은 사라지게 되어 사람들이 불교의 聲唱이라면 범패 뿐인 것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이와 같이 범패와는 다른 독특한 경전독송법이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는 혜교의 설명을 더 들어보기로 하자.

 

然天竺方俗 凡是歌詠法言 皆稱爲唄 至於此土 詠經則稱爲轉讀 歌讚則號爲梵唄 (그러나 印度風俗은 부처님의 말씀을 하거나 하거나 간에 모두 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로 들어와서는 經文하는 것은 轉讀이라 하고 讚文하는 것은 梵唄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경전 안의 문구든 경전 아닌 별도의 찬문이든 모두 똑같이 악기의 반주에 실어 노래를 할 수 있었고 또 양자는 구분없이 라고 불렀는데, 중국에서는 경전 안의 문구를 노래()하는 것은 전독이라 하고 경전 아닌 찬문을 노래()하는 것은 범패라고 불러 구분하였다는 설명이다.

  인도에서는 법다운 말(法言)이라면 를 하든 을 하든 똑같이 한다고 일컬었다는 혜교의 설명은 타당한 듯하다. 즉 불교경전 안에 있는 법언은 대개 偈頌형식이기 때문에 읊기에 적합하였음은 말할 것 없고, 경전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거나 萬法의 이치에 대하여 설명하는 내용으로서 文體的인 형식상 노래하기에 적합한 偈頌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면 다같이 악기의 반주에 실어 노래가사로 삼아서 부를 수 있었는데, 그런 방법을 한다고 일컬었다는 것이다.

 

  이때 慧皎으로 노래하는 방법을 구분한 것은 중국식의 관점에서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즉 바로 다음 문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經典하는 것은 轉讀이고 讚文하는 것은 梵唄이다는 중국의 구분을 그대로 인도의 경우에도 적용하여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 인도에서 과거에 하는 방법과 하는 방법에 구분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문체상으로 불교경전은 契經(sūtra)重頌(geya)(gāthā)의 세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重頌는 형식이 같고 契經은 약간 다르기 때문에 이 두 부류의 낭송방법에 차이가 있어서 혜교가 중송과 게는 , 계경은 으로 나누어 설명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책의 분량을 의 수효로 나타내지만 인도에서는 보통 경전의 길이를 의 갯수로 표현하여 8千頌般若一萬五千頌般若니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관례인 것을 보면 契經 즉 수트라까지도 일정한 형식이 있어 마디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처럼 글의 길이를 의 갯수로 표현할 수 있었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까 계경을 낭송하는 방법이나 게나 중송을 낭송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는 다를 리 없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앞에서 曹植이 만든 轉讀傳聲則三千有餘 在契則四十有二라고 했는데, 이때의 란 바로 契經’(sūtra)에서 따온 말이 아닌가 한다. 만약 그렇다면 요즘의 聲樂이 각각의 가사에 각각의 노래가 있듯이 각각의 경전마다 독송하는 곡이 모두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승전의 기록을 보면 그처럼 모든 경전마다 고유한 독송법이 각각 있었던 같지는 않고 몇 가지의 경전에 한해서만 독송법이 창안되었던 듯하다. 만약 모든 경전마다 고유한 독송법이 있었다면 그것들이 모두 후대에까지 온전히 전수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만들어진 몇개 경전의 독송법도 나중에는 대개 단순한 악곡 몇가지만을 가지고 경전마다 두루 통용하여 誦經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미 혜교 당시에는 경전마다의 고유한 전독법은 사실상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2) 전독에 관한 기록

 

  그러면 이와 같은 혜교의 견해에 의해 편집된 󰡔고승전󰡕經師科에 실린 승려들의 傳記에는 轉讀法이 과연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 少樂轉讀而乏聲 每以不暢爲慨 於是絶粒懺悔 七日七夕 稽首觀音 以祈現報 同學苦諫 誓而不改 至第七日 覺喉內豁然 卽索水洗漱云 吾有應矣 於是作三契經 聲徹里許 遠近驚嗟 悉來觀聽 爾後誦經數十萬言 晝夜諷詠 哀婉通神 至年九十聲猶不變(어려서부터 전독을 좋아하였지만 聲量이 모자라 늘 그것을 아쉬워했는데, 어느 날 곡식을 끊고 참회를 하며 77석동안 관음기도를 하며 報應이 있도록 빌었다. 동학들은 고행을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는 맹서를 하며 태도를 고치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여 마침내 7일째 되는 날 목구멍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자 물을 찾아 양치를 하니 보응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이에 삼계경을 지었는데 목소리가 삼리 정도나 멀리 들리었다. 원근에서 모두 놀라며 와서 그의 목소리를 들어 볼 정도이었는데, 그런 일이 있는 이후로 수십만언의 송경을 하였다. 주야로 풍송을 하여도 애완한 목소리는 神明에 통할 정도였다. 나이가 구십이 되어도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 籥特稟妙聲 善於轉讀 嘗夢天神授其聲法 覺因裁製新聲(支曇籥은 특별히 오묘한 소리를 타고났고 전독을 잘하였다. 언젠가 꿈속에서 천신이 소리하는 법을 전해 주었는데 깨어난 다음 그것을 본떠 신성을 지었다)

 

> 東安嚴公發講 等作三契經竟 嚴徐動麈尾曰 如此讀經 亦不減發講 遂散席 明更開題(동안공 嚴徐講經을 열었는데 法平의 동생 法等이 삼계경을 불렀다. 그가 부르기를 마치자 엄서는 주미를 흔들면서 말하기를 이런 정도의 독경이라면 경전을 강경하는 일보다 못하지 않다면서 그날의 자리를 마감해버리고는 다음날 다시 경전의 제목부터 강설하였다)

 

> 時同寺復有超明明慧 少俱爲梵唄 長齋時轉讀亦有名當世(당시 같은 절에 초명과 명혜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함께 범패를 한 사람으로, 몇일 씩 오래 진행하는 長齋에서 전독하는 일로는 그들 또한 당세에 유명하였다)

 

> 特稟自然之聲 故偏好轉讀 轉讀之名 大盛京邑(특히 빼어난 목소리를 타고나서 전독만을 좋아하였다. 전독으로 서울에서 이름이 크게 났다)

 

> 尤長轉讀 聲至淸而爽快 若乃八關長夕 中宵之後 四衆低昻 睡蛇交至 宗則昇座一轉 梵響干雲 莫不開神暢體 豁然醒悟(轉讀을 특히 잘하였는데 목소리가 지극히 맑고 상쾌하였다. 八關齋를 지내는 긴 밤 같은 경우에 자정 무렵이 지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졸음에 겨워한다. 이때 智宗이 법좌에 올라가 한번 큰소리로 범패를 부르는데, 그러면 졸던 사람들의 정신이 열리고 몸이 퍼져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이었다)

 

> 少好讀經 受業於遷暢二師 初雖祖述其風 晩更措意斟酌 哀婉折衷獨步齊初 永明七年 二月十九日 司徒竟陵文宣王 夢於佛前詠維摩一契 因聲發而覺 卽起至佛堂中 還如夢中法 更詠古維摩一契 便覺韻聲流好 有工恒日 明旦卽集京師 善聲沙門 龍光寶智新安道興多寶慧忍天保超勝及僧辯等 次第作聲 辯傳古維摩一契 瑞應七言偈一契 最是命家之作 後人時有傳者 並訛漏失其大體(어려서부터 독경하기를 좋아하여 曇遷法暢 두 스승에게서 배웠다. 처음에는 스승의 풍격을 祖述하였지만 나중에는 스스로의 소리를 내었는데, 애완절충하는 소리로는 나라 초엽에 독보적이었다. 영명7(489) 29일에 문선왕이 부처님앞에서 <유마일계>를 부르는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도 소리를 질러 그 소리에 놀라 꿈을 깨었다. 그 즉시 일어나 불당으로 가서 꿈속에서 했던대로 다시 <고유마일계>를 불러 보았더니 자신의 소리가 아주 유창하여 마치 오랜 수련을 거친 솜씨처럼 느껴졌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서울에 있는 소리 잘하는 승려들인 용광 보지 신안 도흥 다보 혜인 천보 초승 및 승변 등을 모두 모아 차례로 소리를 하게끔 하였다. 그 가운데 승변이 하는 <고유마일계><서응칠언게일계>가 가장 뛰어났었다. 그 뒤로 이따금 승변의 소리를 전수한 사람이 있었지만 모두 거기에 못미쳤다)

 

> 初受業於安樂辯公 備得其法 而哀婉細妙 特欲過之 齊文宣感夢之後 集諸經師 乃共忍斟酌舊聲 詮品新異 製瑞應四十二契 忍所得最長妙 於是令慧滿僧業僧尙超朗僧期超猷慧旭法律曇慧僧胤慧彖法慈等 四十餘人 皆就忍受學 遂傳法于今(처음 안락사의 승변에게 배워 그의 법을 갖추게 되었는데 애완세묘하기로는 특히 스승을 능가하려고 하였다. 문선왕이 감몽하여 전독하는 經師들을 모두 모이게 한 적이 있을 때 혜인도 함께 품평을 받았었는데, <서응사십이계>는 혜인이 가장 나았다. 이에 혜만 승업 승상 초랑 승기 초유 혜욱 법률 담혜 승윤 혜단 법자 등 40여인에게 모두 혜인한테 가서 배우라고 하였다. 이에 지금까지 그의 법이 전해지고 있다.

 

  가>에서는 풍부한 목소리가 전독의 중요요건이었음을 알 수 있고, >에서는 曹植魚山에서 천신의 소리를 들었다는 설화와 비슷하게 천신으로부터 전수받았음을 내세우고 있는 것을 보면 轉讀僧들은 자신의 소리가 신기하게 들리게끔 만들려고 애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음악사나 중국문학사에 나타나는 新聲이란 용어가 여기에서도 쓰임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도 新聲이란 분명히 인도의 음악인 범패를 가리키고 있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에서는 轉讀功德講經보다 낮은 수준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轉讀대신 讀經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범패와는 독립된 독경의 방법인 전독이란 것이 분명히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보아야 하겠다.

 

  라>에서는 범패를 하는 승려들이 전독을 겸하는 일이 많았음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비슷한 聲唱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齋會에서 전독도 행해지는 것을 보면 재회에서는 轉讀梵唄 唱導 등 모든 聲唱이 다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바>의 경우는 전독이 거의 창도와 다름없는 효용으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이는 나중에 창도와 전독과 범패가 한가지로 통합하게 되는 배경이 바로 이들이 이와 같이 본질적으로 유사한 효용을 가지고 있음 때문이라는 것을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근거로 보인다.

  사>는 문선왕의 노력에 의해 전독법이 후세에 전해지게 된 자세한 배경과 해당 인물들을 설명하는 대목인데, <유마일계><서응칠언일계>가 전독의 대표작으로 전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전독은 애초부터 維摩經瑞應本起經 두 가지 경전에 대해서만 唱法이 만들어졌던 듯하고 나머지 경전의 경우는 아예 전독창법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면 전독에 관한 혜교의 설명에 조식이 소리로는 삼천여, 계로는 사십이계를 만들었다고 혜교는 말하였지만 그것은 󰡔서응본기경󰡕을 산치하여 나온 것이 42계라는 것이지 42개 경전의 전독법을 모두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에서 <서응사십이계>라고 한 것도 조식이 만든 것과 똑같은 서응본기경의 전독법 42계를 말하는 것이지 다른 42개 경전의 전독법을 의미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釋僧饒釋曇憑 條에 나오는 三本起經이란 洛陽康孟詳이 번역한 修行本起經中本起經, 그리고 支謙이 번역한 佛說太子修行本起經의 셋을 말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이들을 종합하면 전독할 수 있게 만들어져 유행한 경전으로는 불설태자서응본기경을 비롯한 세가지 본기경과 古維摩經 넷 정도 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불설태자서응본기경고유마경은 모두 支謙이 번역하였다. 고승전에 나오는 범패 曲名이 대개 본기경과 고유마경 계통 뿐인 것을 보면 이 경전을 번역한 지겸은 음악에도 밝아서 당초 번역할 때 그 경전의 독송법까지 함께 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확하게 전독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전독과 유관한 것으로 짐작되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 少出家稟性淸純 蔬食布衣 以懺誦爲業 誦法華維摩二經(어려서 출가하였는데 품성이 청순하였다. 소식과 포의로 지내며 참송을 업으로 삼아 법화경과 유마경 두 경전을 외었다)

> 守靖閑房 懺誦無輟(한가한 방에 고요히 앉아 참송하기를 끊이지 않았다)

 

위 두가지 기록의 참송이라는 것은 禮懺誦經을 합한 것으로 전독의 遺風으로 짐작된다.

 

(3) 聲唱이 아닌 다른 의미로서의 轉讀

 

  위에서 설명한 轉讀이란 하나같이 불교의 경전을 節奏에 맞추어 아름답고 큰 목소리로 외는 것을 말하는데, ‘轉讀이란 낱말에는 또 한 가지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功德思想에 입각한 하나의 행위로서, 經典字句마다 자세히 읽지 아니하고 題目만 읽은 다음 나머지 본문은 대강 책장만 넘기는 시늉을 하는 짓을 말한다. 그럴 때의 轉讀은 이른 바 眞讀가 되는 것이다. 唐代에 이른 바 開題大會라고 하는 커다란 講經行事를 하거나 할 때, 경전의 제목과 전체의 대의에 대하여는 법사가 나와서 자세히 설명을 하지만 나머지 경전본문은 책장만 넘기고는 끝맺는다. 이럴 때 책장만 넘기는 행위를 전독이라고 했다. 티벳트불교에서는 지금도 경전의 문구를 새긴 여러 개의 양철통 비슷한 통을 절의 탑 주변이나 입구에 꽂아두고서 사람들이 출입하면서 한번 씩 그 통을 돌리게 하는데, 그것은 그 통을 돌리면 거기에 쓰여진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생긴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나온 관습이다. 티벳트불교의 이와 같은 관습도 중국의 轉讀과 어떤 연관이 있는 듯하다. 漢譯轉讀이라는 용어를 西藏佛敎가 취하여 이런 관습을 만들어냈는지 아니면 印度佛敎西藏佛敎에 원래 있던 관습을 중국승려들이 그 의미를 해석하여 전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책장만 넘기면서 그 경전을 다 읽은 것과 같은 효용으로 간주하는 점은 양자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둘 사이에 반드시 연관이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이 경전을 대강 읽고 넘기는 의미로서 轉讀이라 할 경우 의 의미는 轉飜의 뜻이 된다. ‘轉飜經卷의 뜻으로 轉經이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하여는 고승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每至講說 唯敍大意 轉讀而已 (중략) 經義克明 自安始也(매번 강설할 때마다 대의만을 서술하고 나머지는 전독으로 해버렸다. (중략) 경전의 뜻이 극명하게 된 것은 道安에서부터이다)

> 超明旦卽往臨泉寺 遣人告縣令 辦船於江中 轉海龍王經 縣令卽請僧浮船石首 轉經纔竟 遂降大雨 高下皆足(담초는 다음 날 아침 임천사에 가서 사람을 현령에게 보내어 강에 선박 하나를 띄워 해룡왕경을 전독하도록 하자고 청했다. 현령은 곧 담초를 청하여 석수에다 배를 띄웠는데, 전경을 마치자마자 큰비가 내리니 모든 사람들이 흡족해 하였다)

> 又請衆僧夜集爲轉無量壽經(또 여러 스님들을 청하여 밤에 무량수경을 전독하기 위하여 모이게 한다)

> 宗則昇座一轉梵響干雲 莫不開神暢體 豁然醒悟(지종이 법좌에 올라 한번 범패를 하면 소리가 구름까지 닿는 듯하여 누구도 정신과 육체가 탁 열려 활짝 깨달은 것처럼 느끼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가>는 초기경전들이 文意가 잘 통하지 않게 번역되므로 인해 강설을 할 때 자세하게 하지를 못하고 대강 대의만을 설명한 다음 읽고 넘어갈 뿐이었는데, 道安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경전의 문구에 주석을 달기 시작했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 문장이다. 이때 轉讀而已라는 말의 뜻은 대강 읽고만 넘어 갈 뿐이었다는 뜻이다.

>轉讀이라고는 하지 않고 轉經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때의 은 여기서 설명하는 轉讀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담초는 聲唱으로 이름난 승려들의 전기를 모은 經師科에 실린 승려도 아니고 또, 그의 나머지 傳記에도 誦經을 하거나 경전을 읽는 등 聲唱과 조금이라도 관계있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轉經이 여기서 설명하는 轉讀의 의미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나>>에서 우리는 動詞로 쓰여 의 표현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는데, 혜교는 여기 외에도 를 동사로 하여 쓰는 곳이 더 있다.를 이렇게 동사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은 아마 전독의 본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경전을 맑고 고운 소리로 읽는 것을 사람들이 전독이라고 부르자 거기에 착안하여 범패를 맑고 고운 소리로 하는 것도 라>의 경우처럼 轉梵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한 데서 오지 않았나 짐작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속고승전을 읽어 보면 지은이 道宣은 아예 전독과 범패에 대한 구분조차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唐代에는 양자 사이에 구분이 없어졌거나 아니면 순수한 의미의 전독이 사라지고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유는 전독과 범패가 혜교의 설명처럼 원래 인도에서는 구분이 없던 것을 중국에서 음운과 악곡 사이의 괴리를 보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구분하여 만들었던 것이기에 당시 사람들이 귀로만 들어가지고서는 근본적인 차이를 잘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 때문이 크다고 본다. 그런데다가 고승전에도 전독이 이와 같이 두가지의 의미로 혼용되고 있고, 더욱이 중국어 이름을 만들면서 를 사용했는데 이 는 동사로 자주 쓰이는만큼 충분히 헷갈림을 유발하여 의 표현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던 점이 상당한 작용을 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이후 轉經이나 轉梵으로 쓰일 뿐 아니라 經典을 대신하여 講席에 등장하는 變文에도 쓰이어, 敦煌寫本을 보면 轉變이라는 용어도 자주 나오게 된다.

 

3. 梵唄의 발생과 그 流別

 

   (1) 梵唄의 발생과 轉讀과의 관계

 

  전독에 대한 혜교의 설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범패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본래 인도에 있지 않은 구별을 굳이 중국에서 전독과 범패로 구분하는 것이 옳지 않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아니면 혜교 당시에는 이미 거의 사라진 전독을 굳이 옛날에 근거하여 범패와 구분해서 기록하는 것이 의미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혜교는 더 이상 전독과 범패의 차이점에 대하여는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은 채 범패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범패와 전독과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의 범패에 관한 설명을 들어보자.

 

然天竺方俗 凡是歌詠法言 皆稱爲唄 至於此土 詠經則稱爲轉讀 歌讚則號爲梵唄 昔諸天讚唄 皆以韻入絃管 五衆旣與俗違 故宜以聲曲爲妙 原夫梵唄之起 亦兆自陳思 始著太子頌 及睒頌等 因爲之製聲 吐納抑揚 竝法神授 今之皇皇顧惟 蓋其風烈也 其後居士支謙 亦傳梵唄三契 皆湮沒而不存 世有共議一章 恐或謙之餘則也 唯康僧會所造泥洹梵唄 于今尙傳 卽敬謁一契 文出雙卷泥洹 故曰泥洹唄也 爰至晉世 有高座法師 初傳覓歷 今之行地印文 卽其法也 籥公所造六言 卽大慈哀愍一契 于今時有作者 近有西凉州唄 源出關右 而流于晉陽 今之面如滿月是也 凡此諸曲 並製出名師 後人繼作 多所訛漏 或時沙彌小兒 互相傳授 疇昔成規 殆無遺一 惜哉 此旣同是聲例 故備之論末(그러나 印度風俗은 부처님의 말씀을 하거나 하거나 간에 모두 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로 들어와서는 經文하는 것은 轉讀이라 하고 讚文하는 것은 梵唄라고 한다. 옛날 인도 여러나라의 讚唄들은 모두 다 을 달아서 樂器에 실어서 불렀다. 그런데 出家한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본디 俗人과는 다르기 때문에(, 讚文이나 經文의 내용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歌詞보다는) 음성이나 악곡을 더 중요시하였다. 원래 중국에서의 梵唄도 또한 轉讀과 마찬가지로 陳思王 曹植에서부터 비롯하였다. 그는 처음 (太子瑞應本起經刪治하여) <太子頌> <菩薩睒子頌> 등을 짓고는 그것들을 부를 音樂까지도 만들었는데, 내뱉고 들이마시고 내리고 올림이 모두 天神으로부터 傳授받은 것을 법식으로 하였다. 요즈음의 <황황고유>라는 곡이 아마 그것의 영향을 받은 작품일 것이다. 조식의 뒤로는 支謙居士가 나와 梵唄 三契를 전하였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라져 남아있지는 않지만 혹시 지금 세상에 돌아다니는 <共議一章>이란 것이 支謙의 유풍은 아닌가 모르겠다. 오직 康僧會(般泥洹經卷上에 근거하여 만든) <泥洹讚唄>만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敬謁法王來 名顯若雪山이라는 一契가 바로 그것으로서, 그것의 문장이 두권짜리 泥洹經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泥洹唄라고 한다. 東晉 때에 이르러는 高座法師(, 帛尸梨蜜多羅)가 처음에 그것을 覓歷에게 전하였었는데, 요즘의 <행지인문>이 곧 그 법식이다. 支曇籥이 지은 바 六言은 곧 大慈哀愍群生 稽首禮無上尊一契인데, 요즈음도 때로 짓는 사람이 있다. 근자에 서량주패라는 것이 관서지역에서 나와 晋陽으로 흘러 들어왔는데, 요즈음의 <면여만월>이 그것이다. 무릇 이들 여러 곡은 (처음에는) 모두 名師들이 만든 것이었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이어나감에 있어 많이 틀리고 빠진 곳이 생기고 또, 때로는 어린 사미들끼리 서로 전수하기도 하여 옛날의 훌륭했던 규범이 거의 하나도 남아 있지 아니하니 아까울 따름이다. 이 범패도 본디 聲唱의 부류이기에 그러므로 (성창을 다루는) 經師論의 끝에 함께 적어두는 바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도에서는 악기의 반주에 의해 노래하는 범패를 出家衆이 매우 중요시하였다. 둘째, 조식은 (전독 뿐 아니라) 중국의 범패도 맨처음 시작하였고 支謙3를 전했다고 한다. 셋째, 계통이 정확하면서 아직 전해지고 있는 범패로는 강승회의 泥洹唄<경알>1, 帛尸梨蜜多羅<행지인문>, 지담약의 <대자애민>1, 서량주패인 <면여만월> 정도이고, <황황고유>는 조식의 여풍으로, <공의일장>은 지겸의 여풍으로 짐작될 따름이다. 넷째, 이들 범패는 처음에는 名師들이 시작하여 성대하였지만 요즈음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될 뿐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혜교의 설명을 들으면 이미 혜교 당시 불교음악의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던 듯하다. 경전을 노래하는 전독법은 이미 사라졌고 범패 또한 옛날의 좋은 법식은 다 사라지고 그나마 남은 것도 沙彌小兒 互相傳授라고 표현할만큼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초기에는 조식을 비롯한 유능한 사람들이 인도에 필적할만한 높은 수준의 음악을 창시하여 보급하였지만 삼백년도 못가서 이렇게 된 것이다.

 

  범패가 그렇게 쇠락하게 된 이유는 아마 초기의 범패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초기 범패는 아무래도 인도나 서역의 음악을 많이 원용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중국전통의 음악과는 정서적으로 거리가 있게 된 것이다. , 음악이란 아무리 고급의 개인이나 집단이 고급스럽게 만들더라도비록 종교음악이란 특수상황일지라도그것이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기호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초기 범패는 대중의 호응을 고려할만한 蘊釀이 없이 천재적인 몇몇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이었기 때문에 후세에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벌써 혜교 당대에 서량주패라는 중국적인 냄새가 짙을 것으로 짐작되는 범패가 생겨나 유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속고승전󰡕이나 󰡔송고승전󰡕에 보이는 후대 범패의 모습은 상당히 중국적이고 통속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宋代는 물론 이미 唐代에 편찬된 󰡔續高僧傳󰡕에서부터 전독이란 용어가 사라지고 없지만 󰡔고승전󰡕에는 처음 혜교가 밝혔듯이 범패와 구분되는 전독법이 분명히 존재하였음을 나타내는 기록은 2(2)절의 가>에서 아>까지의 기록 외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더 있다.

 

> 巧於轉讀 有無窮聲韻 梵製新奇 特拔終古(전독을 잘하여 무궁한 성운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부르는 범패는 신기하여 특별히 뛰어났다)

 

> 旣有高亮之聲 雅好轉讀 雖依擬前宗而獨拔新異(고량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다 전독을 좋아하였는데, 비록 앞선 스승들을 모방하려고 하면서도 홀로 신이한 바가 있었다)

 

> 少遊京師學轉讀 (중략) 誦三本起經 尤善其聲 後還蜀止龍淵寺 巴漢懷音者 皆崇其聲範 每梵音一吐 輒象馬悲鳴 (중략) 時蜀中有僧令道光 亦微善轉讀(어려서 서울로 가서 전독을 배웠다. (중략) 삼본기경을 송하였는데 그 소리가 더욱 좋았다. 나중에 촉으로 돌아와 용연사에 머물렀는데 파한 지방의 소리한다는 사람은 모두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범음을 한번 토해낼 것 같으면 코끼리나 말의 울음소리처럼 컸다. (중략) 당시 촉지방에는 승령과 도광이 있었는데 역시 전독을 조금 잘하였다)

 

> 但轉讀之爲懿 貴在聲文兩得 若唯聲而不文則 道心無以得生 若唯文而不聲則 俗情無以得入 故經言 以微妙音 歌歎佛德 斯之謂也 而頃世學者 裁得首尾餘聲 便言擅名當世 經文起盡 曾不措懷 或破句以合聲 或分文以足韻 豈唯聲之不足 亦乃文不成詮 聽者唯增怳忽 聞之但益睡眠 使夫八眞明珠 未揜而藏曜 百味淳乳不澆而自薄 哀哉((아무리 樂曲聲唱이 중요하여 鳥獸까지 감동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전독의 아름다움은 고운 소리와 더불어 훌륭한 문장까지 함께 갖추는 데 있다. 부르는 소리만 고울 뿐 가사의 문장이 좋지 않으면 道心이 생겨나기 어렵고, 반대로 문장만 좋을 뿐 소리가 곱지 못하면 俗情를 찾아 들어갈 방법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경전에 미묘한 음성으로써 불덕을 가탄한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전독 배우는 사람들은 겨우 앞뒤 몇 소리만 배워 가지고는 당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들 말한다. 경전의 문구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맺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마음에 두지도 않는데다 어쩔 때는 문장의 구절을 쪼개어서까지 을 맞추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소리가 원만하지 않게 될 뿐 아니라 歌詞라고 할 수 있는 문장도 법도에 어긋나게 되어 듣는 사람은 뭐가 뭔지 모르거나 졸음만 오게 될 뿐이다. 이것은 마치 팔진명주가 아무 것으로도 가리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빛이 사라지는 것과 같고, 백미순유가 물을 타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맛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 슬픈 일이로다)

 

> 其轉讀宣唱 源出非遠 然而應機悟俗 實有偏功 故齊宋雜記 咸條列秀者 今之所取 必其製用超絶 及有一分通感 迺編之傳末(轉讀宣唱하는 일은 그 기원이 오래되거나 불교교단에서 중요한 과목은 아니지만 機微에 대응하여 俗人을 깨닫게 하는데는 실제적인 이 있다. 그래서 󰡔齊宋雜記󰡕 같은 책에도 그것에 뛰어난 이들을 모두 다루었던 것이다. 지금 여기서 취한 바는 그것의 제작이나 효용이 뛰어나거나 통감할만한 것들만을 모아서 󰡔高僧傳󰡕의 말미에 편집한 것이다)

 

2(2)절의 전독에 관한 기록들과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혜교는 분명히 경전을 하는 轉讀을 범패와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승려들의 전기가 실린 권13經師第九편에는 轉讀僧들의 傳記만 실린 것이 아니라 梵唄僧들의 傳記도 함께 실려 있고, 또 위에서 보았듯이 轉讀僧梵唄를 잘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經師科에 범패승과 전독승의 전기를 한데 실은 것은 혜교가 이 두 가지에 현격한 차이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혜교 당시에는 양자간에 구분이 분명하였지만 唐代에 나오는 속고승전을 보면 구분은커녕 轉讀이라는 이름의 本義에 대해서조차 무지했을 정도로 중국불교의 성창은 한가지로 통합되었던 듯하다.

 

 

(2) 梵唄流別

 

  그러면 曹植에 의하여 그런 과정을 거쳐 轉讀과는 별도로 만들어졌던 梵唄는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변화 발전해 나갔을까? 慧皎의 기록으로는 3(1)절에 처음 인용한 고승전經師科論曰끝부분의 언급보다 더 자세한 것이 없다. 曹植 支謙 康僧會 帛尸梨蜜多羅 覓歷 支曇籥 등의 인물 계보만을 대강 들 수 있을 뿐 凡此諸曲 並製出名師 後人繼作 多所訛漏 或時沙彌小兒 互相傳授 疇昔成規 殆無遺一 惜哉(무릇 이들 여러 곡은 처음에는 모두 범패의 名師들이 만든 것이었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이어나감에 있어 많이 틀리고 빠진 곳이 생기고 또, 때로는 어린 사미들끼리 서로 전수하기도 하여 옛날의 훌륭했던 규범이 거의 하나도 남아 있지 아니하니 아까울 따름이다)”라는 탄식으로 맺을 수밖에 없는 혜교 의 표현에서 당시 범패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속고승전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道宣은 마지막 科目雜科聲德篇第十論曰에서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불교음악계의 형편을 且自聲之爲傳 其流雜焉 卽世常行 罕歸探索 今爲未悟 試揚攉而論之(聲唱의 전래란 그 流派가 복잡하여 요즘 유행하는 것들의 근본을 찾아내기란 거의 어려운 일이지만 이제 잘 알지 못하면서도 한번 드러내어 논해 보고자 한다)”라고 솔직하게 토로도 하고 昔演三千 今無一契(예전에는 삼천여계를 불렀다 하나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아니하다)’라고 탄식도 하며 다음과 같이 잇고 있다.

 

故東川諸梵 聲唱尤多 其中高者 則新聲助哀般遮掘勢之類也 地分鄭魏 聲亦參差 然其大途 不爽常習 江表關中 巨細天隔 豈非吳越志揚 俗好浮綺 致使音頌所尙 惟以纖婉爲工 (中略) 若都集道俗 或傾郭大齋 行香長梵 秦聲爲得 五衆常禮 七貴宵興 開發講經 則吳音抑在其次 豈不以淸夜良辰 昏漠相阻 故以淸聲雅調 駭發沈情 京輔常傳 則有大小兩梵 金陵昔弄 亦傳長短兩引 事屬當機 不無其美 劍南隴右 其風體秦 雖或盈虧 不足論評 故知神州一境 聲類旣各不同 (中略) 頌讚之設 其流寔繁 江淮之境 偏饒此翫 彫飾文綺 糅以聲華 隨卷稱揚 任契便搆 然其聲多艶逸 翳覆文詞 聽者但聞飛哢 竟迷是何筌目 關河晉魏 兼而重之 但以言出非文 雅稱呈拙 且其聲約詞豊 易聽而開深信(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여러가지 범패는 성창의 종류가 매우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신성조애><반차굴세>의 부류이다. 중국의 전통음악에서 鄭魏지방의 음악은 흐트러진 음악이라고 말하듯이 범패 또한 지역에 따라 좋고 나쁘고의 구분은 있다. 하지만 어느 지역의 범패든 큰 줄기만큼은 상습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대개 江表지역의 범패와 關中지역의 범패가 크게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는 吳越지방 사람들의 기질이 드날리기 때문에 풍속도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범패의 音頌을 평가하는 기준도 가늘고 고운 것만을 잘하는 것으로 여기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중략) 출가승려나 속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모이는 法席이나, 아니면 도시 전체가 떠나갈 것 같은 커다란 大齋가 열릴 때 行香을 하고 오랜 시간 범패를 할 경우는 秦聲(나라 지역인 관서지방의 음악)이 적당하고, 出家五衆禮懺을 하거나 사대부들이 밤에 강경할 때에 쓰이는 범패는 吳音(나라 지역인 양자강 하류 지역의 음악)이 적당하다. 밤부터 새벽까지 있다가 보면 머리가 어지러워질 것이니 그럴 때 맑고 우아한 곡조로써 가라앉은 마음을 놀라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서울 부근은 大小의 두 가지 범패가 있고, 金陵지방에는 長短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런 聲唱의 부류는 그때그때 機微에 부닥치는 일이기 때문에 긴 것과 짧은 것 둘 다 좋은 점이 없을 수 없다. 그리고 劒南隴右 지방의 범패는 그 풍격이 秦聲과 같기 때문에 좋건 나쁘건 논평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중국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성창의 부류가 모두 다름을 알 수 있다. (中略) 송찬의 경우는 그 유파가 참으로 많은데 江淮지역에서 특히 이것을 좋아한다. (江淮頌讚) 歌詞도 화려한데다 목소리도 고와서 마다 드날리고 마다 꾸민다. 그러나 목소리가 지나치게 염일하게 하기 때문에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듣는 사람은 단지 드날리는 소리만 들을 뿐 무슨 내용을 말하는지는 모를 정도이다. 關河晉魏 지역에서도 이 송찬을 매우 중시하는데, 다만 가사가 너무 수식이 없어 졸박함에서 오히려 전아함이 나타나는 듯하고 소리는 단순하면서 가사내용이 풍성하기 때문에 알아듣기에도 쉬어서 信心을 내게 만든다.)

 

  대개 이 정도로 지역에 따른 개괄적인 특징만을 서술할 수 있을 뿐 구체적으로 아무개의 성창은 어느 제자에게 전해졌다는 식의 서술을 할 수 있는 형편은 못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불교의 성창이 교단을 중심으로 하여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른 음악적 특성을 운위할 수 있을 정도의 구분만이 존재할 정도가 되었다면 이미 불교 고유의 음악은 보존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인도의 법식을 따르려고 하는 초기의 특징은 사라져 버리고 불교음악도 순전한 중국적인 음악으로 변하여 토속음악의 지역적 특색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짐은 벌써 혜교의 고승전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승전󰡕13 釋曇智 條附見人物智欣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혜교는 그를 善能側調라고 표현하고 있다. 범패를 잘하는 승려에게 중국 전통음악의 곡조이름인 側調를 잘한다고 표현한 것은 벌써 범패가 중국 전통음악의 용어로 표현될 수 있을 정도로 중국화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로 다음에 나오는 僧辯 條를 보면 승변은 어려서부터 독경하기를 좋아하여 曇遷 曇遷 條에 부견인물로 나오는 法暢이라는 두 스승에게서 배웠다는데, 그의 梵唄聲哀婉折衷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중국의 전통음악에서 주로 하는 용어이다. 曇遷 條에 나오는 부견인물인 法暢道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혜교는 並富聲哀婉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승변의 제자인 慧忍 條에서는 哀婉細妙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다시피 서량주패라고 하는 지명을 내세운 범패가 나온 것을 보더라도 벌써 남북조시대부터 범패는 중국의 음악으로 흡수되기 시작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3) 범패 소리의 특징

 

  이상으로 중국불교 범패의 발생과 이후 그것의 流別에 대하여 대강 살펴보았다. 그런데 비록 오늘 날 그것을 재생하여 들을 수는 없다 해도 인도불교의 찬패를 본떠서 만든 중국의 범패란 것이 초기에는 어떤 특징을 지닌 성창이었고 또 중국화한 다음에는 어떤 특징을 지니게 되는지에 대한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그러면 당시의 기록을 통하여나마 당시 범패소리의 특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앞서 혜교의 설명에 의하자면 중국 범패의 시작은 曹植이 지은 <太子頌><睒頌>인데, 그것들에 대하여 혜교는 吐納抑揚 竝法神授(내뱉고 들이마시고 내리고 올림이 모두 天神으로부터 傳授받은 것을 법식으로 하였다)”라고만 표현할 뿐 구체적인 특징을 기술하지는 않았다. 아마 본인이 직접 들어보지 않은 이상 혜교 자신도 이보다 더 자세히 추켜세울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조식이 비록 중국음으로 부르기 쉽게 작곡하였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바탕은 인도음악이었을 것이므로 그것이 중국인에게는 神授로 들렸을런지는 모른다. 그렇다면 그 神授라고 표현한 소리는 어떠한 특징을 지닌 소리였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고승전󰡕󰡔속고승전󰡕을 비롯한 여러 자료들에서 주워 모아 종합해보는 도리밖에 없다. 우선 󰡔고승전󰡕에 표현된 범패 소리의 특징에 대한 기술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淸靡哀亮(맑고도 화려하며, 애처롭고도 아리땁다)

>聲徹里許 遠近驚嗟 悉來觀聽 (중략) 哀婉通神 至年九十聲猶不變(소리가 삼리 밖까지 들리니 원근 사람들이 놀라 감탄하며 모두 와서 듣는다. (중략) 애처롭고 가느다라며 귀신에 통한 듯한데, 나이가 아흔살이 되어도 여전히 목소리가 변하지 않았다)

>特稟妙聲 善於轉讀 嘗夢天神授其聲法 覺因裁製新聲 梵響淸靡(특별히 묘한 소리를 타고났고 전독을 잘하였다. 언젠가 꿈에서 천신이 소리하는 법을 전해주기에 깨어나서 그대로 신성을 만들었는데, 범패소리의 울림이 맑고도 화려했다)

>特稟自然之聲 故偏好轉讀 發響含奇 製無定准 條章折句 綺麗分明(특별히 자연스런 소리를 타고났고, 전독을 유난히 좋아하였다. 터져나오는 울림은 기특하였고 일정한 형식이 없이 불렀는데, 章句를 나누는 것이 화려하고도 분명하였다)

>至淸而爽快 若乃八關長夕 中宵之後 四衆低昻 睡蛇交至 宗則昇座一轉 梵響干雲 莫不開神暢體 豁然醒悟(소리가 지극히 맑으면서도 상쾌하였다. 팔관재를 지내는 긴 밤 같은 경우 자정이 지나 대중들이 졸음에 겨워하면 智宗이 법좌에 올라가 한 바탕 하늘까지 울리는 범패를 부르면 정신과 육체가 탁 트여 갑자기 깨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巧於轉讀 有無窮聲韻 梵製新奇 特拔終古(전독을 잘하여 소리가 무궁하였고, 범패짓는 것도 신기하여 매우 뛰어났다)

>旣有高亮之聲 雅好轉讀 雖依擬前宗而獨拔新異 高調淸徹(고량한 목소리를 지닌데다 전독을 좋아하였다. 비록 앞사람을 좇아서 지으면서도 독특하고도 신이하게 뛰어난 바가 있었고, 높은 곡조는 청철하였다)

>哀婉折衷 獨步齊初(애완절충하기로는 제나라 초엽에 독보적이었다)

>音調甚工 (중략) 每梵音一吐 輒象馬悲鳴 行途住足(음조가 매우 공교로왔다. (중략) 범패소리를 한번 토해내면 코끼리나 말의 울음과 같아 지나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었다)

>受業於安樂辯公 備得其法 而哀婉細妙 特欲過之(안락사의 僧辯에게서 배워 그 사람의 법식을 갖추었지만 그러면서도 애완하고 세묘하기로는 그보다 더하였다)

>音吐嘹亮 洗悟塵心 指事適時 言不孤發 獨步於宋代之初(소리가 요량하여 마음의 더러운 때를 씻어주는 것 같았으며, 지적하는 것은 제때에 맞을 뿐 아니라 말은 어김없이 對句로 하였으니, 송대초에 독보적이었다)

>亦善唱說 製睒經新聲 哀亮有(창설도 잘하였고 섬송과 신성을 짓기도 하였는데 그 소리는 애량하고 차서가 있었다)

>音吐流便 自旦之夕 袁不能窮(소리가 유편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끝날 줄을 몰랐다)

 

>>經師科의 승려들에 대한 기술이고 카>>唱導科의 승려들에 대한 기술이다. 모두 그들이 지녔던 높은 수준의 성창에 대한 특징을 기술한 것이므로 굳이 창도승의 경우와 경사승의 경우를 나눌 필요가 없을 듯하여 한데 모아 보았다. 위와 같은 혜교의 기술에서 우리는 범패에 대하여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추출해낼 수 있다.

무엇보다 멀리서도 들릴 정도의 큰 소리와 오랫 동안 부를 수 있는 능력이 대체적으로 기본조건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거기에다 神授라고 할만한 아름다움을 더해야 하는데, 그 아름다움의 특징을 혜교는 대체로 淸靡’ ‘哀婉’ ‘哀亮’ ‘高亮’ ‘細妙’ ‘嘹亮’ ‘流便등의 문자로 나타내고 있다. 이들 문자는 너무 관념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소리의 어떤 모습을 형용한 것인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지만 淸靡란 맑고도 華美한 것을 말하고, ‘哀婉이나 哀亮은 애처로운 아리따움을, ‘高亮嘹亮은 드높고도 맑음을, ‘細妙는 가느다라면서도 미묘함을, ‘流便은 거침없이 매끄러움을 뜻하니 대체로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범패소리의 특징을 짐작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러면 속고승전송고승전 대송승사략에 기술된 범패소리의 특징을 한번 더 찾아보기로 하자.

 

>長引滔滔 淸流不竭 然其聲發喉中 脣口不動 與人並立 推檢莫知 (중략) 聞常一梵 颯然傾耳 皆摧心喪膽 如飢渴焉 僉曰 若此聲梵 有心聞之 何得不善也 (中略) 道英喉顙偉壯 詞氣雄遠 大衆一聚 其數萬餘 聲調稜稜 高超衆外 興善大殿 鋪基十畝 櫺扇高大 非卒搖鼓 及英引衆 遶旋行次窓門 聲聒衝擊 皆爲動振 神爽唱梵 彌工長引 (도도하게 길게 늘여 빼는 소리는 마치 시냇물이 끊임없이 졸졸 흐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목구멍 안에서만 나오고 입과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서 다른 사람과 옆에 서있으면 누가 부르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중략) 慧常이 하는 범패를 한번 들으면 사람들은 바람이 일듯 귀를 기울이고 모두 심장이 멎은 듯 담이 떨어지는 듯 기갈이 나는 듯 하였다. 마음이란 것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범패 소리를 듣고서 어찌 아니 착할 수 있겠는가 라고 모두들 말하였다. (중략) 道英은 목소리가 우렁차고 가사도 또렷하게 발음하여 대중이 한번 모이면 그 수가 만명 남짓한데도 찌렁찌렁한 목소리는 대중들이 모인 바깥에까지도 들릴 정도였다. 흥선사의 大殿은 안의 넓이가 十畝나 되고 창문도 크고 높아서 쉽게 흔들리지 않지만, 도영이 대중을 인도하고 돌면서 창문 옆을 지나가면 목소리의 충격으로 창문이 모두 다 흔들릴 정도였다. 神爽의 범패는 것은 길게 늘여 끄는 것을 더욱 잘하였다.

>法建登座爲誦 或似急流之注峻壑 其吐納音句 呼噏氣息 或類淸風之入高松(법건이 법좌에 올라 독송을 하면 흡사 세찬 물이 골짜기를 흘러내리듯 소리를 내지르는데,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는 마치 맑은 바람이 높은 소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듯하였다)

>聲調超挺 特異人倫 寺有塔基 至於靜夜 於上讚禮 聲響飛衝 周三十里 四遠所聞 無不驚仰(성조가 특별히 다른사람들보다 뛰어났다. 고요한 밤이면 절안에 있는 탑의 기단에 올라가 예불을 올리는데,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삼십리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만큼 커서 모두들 놀라 우러렀다)

>爰始經師 爲德本實 以聲糅文 將使聽者 神開因聲 以從廻向 頃世皆捐其旨 鄭衛彌流 以哀婉爲入神(본래 경사의 덕은 실다움에 근본하여 소리를 문에 섞어가지고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리 때문에 신기가 열리도록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경사들은 그 취지를 버리고서 저속한 음악의 종류에만 휩쓸려 애완함을 가장 높이치고 있다)

>今之歌讚 附麗淫哇之曲 惉懘之音 加釀瓌辭 包藏密呪 敷爲梵奏 此實新聲也(요즘의 가찬이라고 하는 것들은 음란한 곡조와 어지러운 가락에다 화려하게 부쳐 가지고, 거기에다 반지르르한 修辭도 더하고 秘密呪로 포장도 한 다음 인도음악 연주에다 얹어놓은 것들뿐이니 이런 것들은 사실상 신성과 다름없다)

>精守戒範 而善長嘯 嘯終乃牽曳其聲 杳入雲際 如吹笳葉 若揭遊絲 徐擧徐揚 載哀載咽 颼飅淒切 聽者悲凉 謂之哀松之梵(계율을 꼼꼼이 지키고 長嘯를 잘하였다. 를 마칠 때면 그 소리를 잡아 끌어당겨 아득히 구름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는데, 그 소리는 마치 호드기 잎파리를 부는 듯도 하고 遊絲를 걸친 듯도 하였다. 천천히 들렸다 천천히 날렸다 하며, 슬프기도 하고 목이 메이기도 하는가하면, 처절한 바람소리 같기도 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비량하게 만들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애송지범이라고 불렀다.

>其頌聲也 撰象天樂 若靈籥自發 儀刑群品 觸物有寄 一吟一詠 狀鳥步獸行也 一弄一引 類乎物情也 情與類遷 則聲隨九變而成歌 氣與數合 則五音協律而俱作 附之金石 則百獸率舞 奏之管絃 則人神同感 斯乃窮音聲之妙會也 (하는 音聲天樂을 본떠 만든 것이기에 하늘나라 피리가 저절로 울려 나오는 듯하다. 만물의 소리를 본떠서 만들었기에 귀에 닿을 때마다 기탁하는 어떤 뜻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하고 하는 소리 하나하나는 날짐승이나 길짐승들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하고 하는 소리 하나하나는 살아있는 것들의 감정과 비슷하다. 感情品類에 따라서 달라지는 법이라 소리가 九變을 따르면 노래를 이루게 되고, 氣運數理와 합치되는 법이라 五音에 맞추어 함께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악기에 싣게 되면 온갖 짐승도 모두 함께 춤을 추고 사람과 귀신도 모두 함께 감동하게 되니, 이런 경지라야 비로소 聲樂奧妙한 경지라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예문들을 보면 범패소리에 대하여 혜교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즉 목소리가 크다 하더라도 가>와 다>처럼 어느 정도 크다는 사실적인 표현이나, 입모양을 바꾸지 않은 채 소리를 낸다고도 한 표현은 범패소리의 크기와 창법을 짐작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가>에서 長引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때부터 범패소리는 길게 끄는 소리가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長嘯라는 것도 표현을 라고 했을 뿐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라>에서 哀婉爲入神이라고 한 것이나, 앞서 (2)장에서 인용한 부분 즉, ‘惟以纖婉爲工이라든가 以淸聲雅調 駭發沈情其聲多艶逸과 같은 표현은 혜교의 기술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다만 혜교는 범패소리가 哀婉한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기술하고 있다. 아마 그것은 이들이 비록 승려이면서도 儒家的인 음악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실제 범패승들이 세속적인 음악의 기호에 많이 이끌렸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하고자 해서였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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