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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中國佛敎 講經法會의 流變

by 曺明和 2021. 7. 31.

<1997년 발표>

==== 目 次 ====

1. 講經起源 : 法會

2. 講經分化와 그 종류 

  (1) 一日講開題大會 

  (2) 依經講經 

3. 講經의 형식과 儀式절차 

  (1) 都講 

  (2) 講經儀式

4. 講經俗化講唱

  (1) 講經의 俗化

    가) 通俗化의 문화적 배경

    나) 唱導와의 관계

    다) 俗講

  (2) 講唱의 발달

    가) 講經과 講唱

    나) 敦煌의 講唱

5. 맺음말

 

1. 講經起源 : 法會

  阿含이나 律藏에서 볼 수 있는 원시불교교단에서 행한 대중적인 모임의 이름으로는 ‘pañcavārṣikamaha(五歲大會)’ 또는 ‘ṣaḍvārṣikamaha(六歲大會)’라고 하는 것이 가장 원형이 아닌가 한데, 이런 모임의 주된 목적은 수행자인 사문들에게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즉 이런 모임을 통하여 출가수행자에게 필요한 의복이나 음식이나 약을 나누어 주는 것이 인도불교의 습속이었다.

 

원시경전이나 율장에 보이는 대중적인 집회의 이름 가운데 또 한가지는 ()’라고 번역하는 팔리어 ‘uposatha’이다. 이것은 원래 정오를 넘어서면 음식을 먹지 않는 戒法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나중에는 正午前 , 밥먹는 때에 승려들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것으로 轉意되어서 僧團이 정한 끼니 때에 사문들을 모아 음식을 먹이는 모임을 통상 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모임도 먹을 것을 주는 모임임은 앞의 경우와 한가지이다. 그래서 초기중국불교에서도 커다란 集會는 대개 국왕이 승려들을 모아서 음식을 먹이는 잔치인 飯僧이라는 이름의 모임이었는데, 후대에는 이것이 모임의 목적보다는 모임 자체를 부르는 용어로 굳어지게 되어 굳이 승려들에게 음식을 먹이기 위한 목적의 모임이 아니더라도 대중적인 집회이면 대개 齋會또는 라고 부르게 되었고 또 이렇게 해서 중국불교는 어느 모임이든 참석하는 대중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자연스런 관습이 되었다.

 

  이처럼 음식을 비롯한 공양물을 주는 관습은 자비를 베푸는 기본적인 행위인 점에서 어느 종교에나 있는 자연스런 관습이고 또 인구에 비하여 식량이 부족했던 인도나 중국과 같은 대륙의 고대사회 환경을 고려하자면 필수적인 사회사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반면 인도와 중국의 불교도들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자신이 살아가는데 의지하는 관념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공덕사상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교단의 건강성을 해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본다.

  대중적인 집회가 이렇게 해서 점점 잦아지면서부터는 집회의 의식절차도 저절로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모여서 그저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염불도 하고 부처님의 덕을 송찬하는가 하면 불법을 선전하기도 하고 국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도나 염불이 몇일씩 걸리게 되어 지루함을 느끼게 될 때면 중간에 唱導僧이 단상위로 나와서 唱導를 하기도 하고 聲唱이 좋은 승려가 나와서 梵唄讀經을 멋드러지게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였으니 이런 것들은 차차 의식절차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사찰의 집회에서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여러 과목 가운데 가장 차원이 높고 공덕이 殊勝하다고 인식되는 과목은 講經이었다. 강경을 위한 모임이 아닌 에서도 중간에 강경을 하는 경우가 점차 생기다가 마침내 唐代 무렵이 되면 아예 강경이라는 이름이 사찰집회의 일반적인 대명사가 되어버린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문헌상 講經의 시초는 曹魏朱士行이 서기 261년에 󰡔道行般若經󰡕했다는 기록이다. 불교의 전래 초기에는 경전에 대한 講說보다는 기초적인 교리의 전달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經文에 입각한 講說은 행하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대승경전처럼 전편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경전을 강설하는 것보다 󰡔四十二章經󰡕이나 󰡔法句經󰡕처럼 단편적인 내용의 合集으로 된 경전을 해설한다든가, 五蘊이니 四諦八正道니 하는 法數들에 대한 설명, 또는 이니 因果因緣이니 하는 기초적 교리를 해설하는 것이 초기강경의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승경전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에도 講經儀式이라든가 규모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다가 釋道安(314-385)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講經行事가 시작되니, 章句玄義 등의 이름을 한 경전의 여러 註釋書들은 바로 이와 같은 講經結果를 책으로 엮어낸 것들이다.

  한편 淸玄談論을 즐기는 풍조에 젖어 있던 南北朝士大夫들도 그들의 견지에서는 새로운 玄理인 불교를 접하게 되자 이내 불교를 좋아하게 되어 僧徒와 서로 내왕하며 담론하는 풍조가 생겼으니 주지하고 있는 白蓮社같은 것이 바로 그런 풍조의 대표적인 이다. 그러다가 불교를 좋아하는 士大夫王公貴族조차 직접 講經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경은 이와 같이 敎團內의 출가사문들을 대상으로 한 敎學的講經이건 俗人을 상대로 한 대중적인 강경이건 간에 어쨌든 南北朝時代부터 대단히 성행하기 시작하였는데, 敎團內講經은 그래도 전통적인 儀式과 더불어 계속 그 모습을 유지해 나갔지만 弘布의 수단으로 행하여지는 대중적인 講經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가지 모습으로 분화발전을 해나간다.

 

2. 講經分化와 그 종류

 

  중국불교에서 강경의 종류는 형식상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경전의 文句를 일일이 들어가면서 해설을 하는 강경이 있고, 경전문구에 의존하지 않고 그 경전의 旨趣만을 설명하는 강경이 있다. 그리고 강경은 성격상으로도 두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첫째는 교단내에서 승려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의 정식 강경과 둘째는 속인대중에게 교리를 선전하고자 하는 목적의 대중적인 강경이다.

 

  (1) 一日講開題大會

<高僧傳>에 보이는 강경을 나타내는 용어들은 대체로 사찰집회의 대명사격인 法席또는 法會의 뜻과 동일하게 쓰이고 있다.

  강경은 그 형식과 절차가 각 사찰의 전통대로 이어져 내려오기도 했겠지만 都城寺院의 경우 황제의 친림이나 外護를 염두에 두게 되고 지방사원의 경우는 刺史都督 등 지방관의 외호를 의식하여 국가권력과의 융화를 도모하는 이른 바 國敎化의 노력이 이루어져 세속적인 거대한 행사로 나타나기도 한다. 梁武帝 때에 시작한 이른 바 無遮大會와 같은 대법회가 바로 그러한 예인데, 이때에는 무제 스스로 涅槃經題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처럼 커다란 法儀行事에서 행하여진 강경이란 것은 경전문구를 해설하는 것은 아니다. 經典 전부를 몇일이나 몇달에 걸쳐 講說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한 자리에서 경전의 제목과 그 경전 전체의 旨趣만을 강설하고 마는 이른 바 開題大會라고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행사자체만의 공덕을 염두에 두는 일로서, 經典 題名意味緣由 序分에 해당되는 부분 만을 자세하게 강설하고 나머지는 대강 책장을 넘기며 읽는 시늉만을 하는 이른바 轉讀으로 끝내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강경에는 僧團 내에서 경전의 문구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釋道安 이래의 학구적이며 精深講經도 있었고, 경전문구대로 해설하든 그렇지 않고 경전의 지취만을 해설하든 간에 道俗을 막론하고 대외적으로 청중을 개방하여 법문을 설하는 강경도 있었으며, 그리고 無遮大會처럼 공덕을 염두에 둔 대규모 의식으로서 진행되는 개제대회와 같은 형식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불교의 특성상 세가지가 굳이 따로 나뉘어서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고 유명한 설법사의 강경이 있다면 승속을 막론하고 와서 듣기도 하고, 황제가 친림하는 大齋가 있다 하면 거기에 유명한 설법사를 초빙하여 설법을 듣기도 하는 등 형식에 그다지 구애를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성격의 강경법회는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집회의 이름에도 그다지 엄격한 구분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강경이란 이름이 사찰집회의 일반적인 대명사가 되버린 것이다.

 

      가. 汰下都至瓦官寺 晉太宗簡文皇帝 深相敬重 請講放光經開題大會 帝親臨幸 王侯公卿 莫不畢集(法汰都城으로 내려와 와관사에 머물렀는데 간문제가 그를 깊이 존경하여 방광경개제대회를 강하도록 청하였다. 강하는 날 황제는 친히 자리에 참석하였고 왕후공경들도 모두 모였다.)

      나. 勅猛於寺開講成實 序題之日帝親臨幸 公卿皆集 四遠學賓負帙齊至 猛神韻無忤吐納詳審 帝稱善(道猛에게 절에서 成實論을 개강하도록 칙명을 내렸다. 序題의 날에 황제는 친히 자리에 참석하였고 공경들도 모두 모였으며 사방 먼곳에서 배우고자 하는 이들도 책을 짊어지고 모두 모였다. 道猛이 신령스런 氣韻으로 거침없고 지극히 자세하게 강의하자 황제는 잘한다고 칭찬하였다)

      다. 東安嚴公發講 等作三契經竟 嚴徐動麈尾曰 如此讀經 亦不減發講 遂散席 明更開題(동안엄공이 발강을 하였는데 法平의 동생 法等이 삼계경을 朗誦하여 마치자 엄서는 주미를 흔들면서 말하기를 이런 정도의 독경이라면 發講보다 못하지 않다면서 그날의 자리는 그것으로 마감하고 다음날 다시 개제를 하였다)

 

  위의 세가지 기록을 보면 講經發講開題등이 이름에 따라 내용도 각각 달랐던 것이 아니라 동일한 내용에 대하여 달리 표현한 것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강경의 진행방식 또한 경전의 문구에 따라 강의하는 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고 청중에 제한이 있었던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경문에 의거하지 않는 형식의 강경을 당시 어떻게 이름하였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없지만 아마 명백한 구분없이 開題大會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듯하다. 이처럼 행사의 이름이 되버린 開題는 나중에는 行事에 등장하는 聲唱과 개념이 섞이어 󰡔宋高僧傳󰡕이 만들어질 무렵에는 開題聲唱의 한 종류로 불리웠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그것은 이름이 적절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이다.

  그런데 日本僧 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를 보면 一日講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경문에 의거하는 강경과 一日講을 구분하여 儀式절차를 기록하고 있다. 이 일일강에 대한 이해는 敦煌寫本 가운데에 있는 講經文을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2) 依經講經

  일일강과는 달리 經典文句를 일일이 들어가면서 해설을 하는 강경을 의경강경이라고 이름해 보았는데, 이런 형식의 강경은 지극히 일반적인 방법이므로 굳이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다. 대승경전에 대한 광범위한 강경이 유행하여 승속을 막론하고 유명한 논사를 찾아다니며 경전들을 섭렵하는 풍조가 교단 내외에 만연했고, 선종이 발흥하기 전까지 강경은 중국불교 교단의 최고 수행과목으로 자리잡았다.

 

      가. 頃之南適江陵 於新寺夏坐開講十誦

(얼마 안있어 남쪽 강릉으로 내려가 신사에서 夏安居時에 십송률을 강하였다)

      나. 遊刃衆典 尤善法華 後辭深出京 復大開講席

(여러 경전들을 다 섭렵하였지만 그 중 법화경에 더욱 밝았다. 나중에 竺法深에게서 떠나 서울로 나와서 다시 강석을 크게 열었다)

      다. 止江陵長沙寺 講說衆經 受業者四百餘人

(강릉의 장사사에 머물러 여러 경전들을 강하였는데, 배우는 사람이 사백여명이나 되었다)

      라. 每以法華爲會三之旨 無量壽爲淨土之因 常吟詠二部 有衆則講 獨處則誦

(법화경은 會三歸一의 뜻이 있고 무량수경은 西方淨土로 가는 인연이 된다고 해서 늘 이 두가지 경전을 음영하였다. 사람들이 있으면 강을 하고 혼자 있을 때는 송을 하고 하는 식이었다)

      마. 於是四五年中 遊歷講肆備訪衆師 善小品法華思益維摩金剛波若勝鬘等經

(이에 사오년간 강석들을 유력하고 다니고 여러 강사들을 찾아 배우러 다녔다. 소품법화경사익경유마경금강반야경승만경 등에 능하였다)

      바. 年二十四便就講說 嘗有客聽講 難實相義 往復移時 彌增疑昧 遠乃引莊子義爲連類 於是惑者曉然 是後安公特聽慧遠 不廢俗書

(24살밖에 안되었을 때 강설을 시작하였다. 언젠가 강의를 듣던 어떤 사람과 질문을 주고 받으며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질문이 몇번 왔다갔다 하였지만 그럴수록 그 사람은 더욱 의문에 싸여 모르게 되자 혜원이 할 수 없이 󰡔莊子󰡕의 의취를 가져다가 빗대어 설명하자 그제서야 그 사람이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道安慧遠에게만 특별히 속가의 서적들을 인용하더라도 허락해 주셨다)

      사. 晩入吳虎丘寺 講禮易春秋各七遍 法華大品維摩 各十五遍

(만년에 의 호구사로 들어가 예기 역경 춘추를 각각 일곱번, 법화경 대품반야경 유마경을 각각 열다섯번 씩 강하였다.)

      아. 吾出講八年 無一問至此

(내가 강경을 팔년씩이나 했지만 이런 질문은 한번도 없었다)

      자. 時共目之說法師也 與講經論 名同事異 論師所設 務存章句 消判生起 採結詞義 巖之制用 隨狀立儀 所有控引 多取雜藏百譬 異相聯璧 觀公導文 王孺懺法 梁高沈約 徐庾晉宋 等數十家

(당시 모두 그를 說法師라고 불렀는데, 經論을 강하는 사람도 똑같이 설법사라고 칭하지만 보암이 설법하는 내용은 그런 사람들과는 달랐다. 經論을 강설하는 說法師들이 하는 일이란 章句를 해석하고 科判을 해석하며 말의 뜻에다 중점을 두지만, 寶巖이 하는 설법은 상황에 따라 威儀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인용하는 것은 雜寶藏經百喩經經律異相聯璧眞觀導文王僧孺懺悔文梁高僧傳沈約懺文徐庾懺文 等 晉宋 수십가의 글들이었다.)

      차. 初經出已久 而舊譯時謬 致使深藏隱沒未通 每至講說 唯敍大意 轉讀而已 安窮覽經典 鉤深致遠 其所注般若道行密迹安般諸經 並尋文比句 爲起盡之義 乃析疑甄解 凡二十二卷 序致淵富 妙盡深旨 條貫旣敍 文理會通 經義克明 自安始也.

(초기역경들은 나온지도 오래된데다 구역경전들은 틀린 곳도 많아서 뜻이 잘 안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강설할 때는 의례 대의만을 설명하고 본문은 대강 읽으면서 넘기는 전독을 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도안은 경전들을 모두 다 들여다 보고서 자세하게 뜻을 파악하였으니, 그가 주석한 반야도행밀적안반 등의 여러 경전은 문구를 파고 들어가서 의미를 찾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명확하게 해석하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22권은 모두 내용도 풍부하고 경전의 깊은 뜻을 다 밝혔을 뿐 아니라 조리도 있고 문리도 회통하였다. 그러니 경전의 뜻이 밝게 드러나기는 도안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3. 講經의 형식과 儀式節次

  (1) 都講

  의경강경이라고 이름한 정식강경의 기본형식은 講師와 또 다른 한 사람이 함께 각각 남쪽과 북쪽에 있는 高座에 올라가 서로 마주보고 앉은 다음 한쪽에서 먼저 經文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 부분을 講說해 나가는 일을 반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經文朗誦하고 論議講師에게 던지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정식의 강경에는 반드시 있는 법인데 그러한 을 맡는 사람을 都講이라 부른다. 강경회에서 都講을 둔 僧傳에 다음과 같이 발견된다.

 

      가. 講維摩經 遁爲法師 許詢爲都講 遁通一義 衆人咸謂詢無以措難 詢設一難 亦謂遁不復能通 如此至竟 兩家不竭

(유마경을 강하는데 支遁이 법사가 되고 허순이 도강이 되었다. 지둔이 한 가지 법의에 대하여 을 하면 사람들은 허순이 이 정도에 대해서는 감히 을 달지는 못할게야!”라고들 했지만 허순은 을 달았고, 허순이 이렇게 한 가지에 대하여 을 달게 되면 사람들은 또 지둔이 더 이상 은 못하겠지!”라고 말했지만 지둔은 다시 을 하였다. 이처럼 이 두 사람은 끝까지 막힘이 없이 왔다 갔다 하였다)

      나. 師經爲姚萇講法華 貧道爲都講

(스승님께서 예전에 姚萇에게 법화경을 강설하실 때에 제가 도강을 하였었습니다)

      다. 性强記 不煩都講

(천성이 기억력이 좋아 都講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라. 又嘗於講日謂衆曰 昔彌天釋道安 每講於定坐後 常使都講等 爲含靈轉經三契 此事久廢

(또 언젠가 강경하는 날에 여러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전 미천석도안스님께서는 강경하실 때마다 정좌하신 다음 언제나 도강으로 하여금 含靈들을 위하여 삼계경을 낭송하여 부르도록 하셨는데 이 일은 그 뒤로 지금까지 오랫동안 행하여지지 않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마. 嘗於夜中 忽聞扣戶云 欲請法師九旬說法 邃不許 固請乃赴之 而猶是眠中 比覺己身在白馬塢神祠中 幷一弟子 自爾日日密往 餘無知者 後寺僧經祠前過 見有兩高座 邃在北弟子在南 如有講說聲 又聞有奇香之氣 於是道俗共傳 咸云神異

(언젠가 밤중에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법사님께서 구순설법을 해주십시요라고 귀신이 청하였다. 담수는 처음에는 허락하지 아니하였지만 굳이 청하므로 마침내 귀신을 따라갔는데 그것은 잠든 채이었고, 깨어났을 때는 자신의 몸이 이미 백마오신사 안에 자신의 제자 한 사람과 같이 있었다. 그일이 있은 뒤로 담수는 날마다 은밀히 그 곳으로 갔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나중에 절의 한 승려가 우연히 사당 앞을 지나가다가 안을 들여다보니 고좌가 두 자리 있어서 담수는 북쪽에 앉아 있고 제자 한 사람은 남쪽에 앉아 있으면서 강설을 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기이한 향내도 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도속이 모두 알게 되어 모두들 신이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講席에서 경전의 문구를 하고 강사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는 역할의 이 都講이란 은 아무래도 講主法師보다는 이 낮은 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니 다음과 같은 예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僧叡見而奇之 問曰 君於佛法且欲何願 導曰 且願爲法師作都講 叡曰 君方當爲萬人法主 豈肯對揚小師乎

僧叡가 보고서 그를 기특하게 여겨 묻기를 ; 그대는 불법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하니, 승도가 대답하기를 ; 원컨대 법사님을 위하여 도강이 되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승예가 말하기를 ; 그대는 마땅히 만인을 위한 법주가 되어야 할 터인즉 어찌 하찮은 승려가 되려고 하는가 라고 하였다.

 

  경전에 나오는 도강의 기록은 支謙󰡔大明度無極經󰡕第一品 중의 善業爲法都講이라는 표현이 가장 이른 듯하다. 그 경전의 原注에도 善業(卽 須菩提)於此淸淨法中爲都講 秋露子(卽 舍利弗)於無比法中爲都講이라고 되어 있어 都講의 제도가 불교에 원래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뿐 아니라 儒家에서도 都講이란 낱말이 다음과 같은 곳에서 쓰이고 있음을 들어 孫楷第 같은 학자는 唐代俗講軌範與其本之體裁라는 論文에서 道安講制를 정할 때에 儒家講制를 본떴는지도 모르겠다고 주장한다.

 

      가. 師事九江太守房元 治穀梁春秋 爲元都講

(구강태수 방원을 사사하여 춘추곡량전을 공부하면서 방원의 도강이 되었다)

      나. 客居於湖 不答州郡禮命數十年 衆人謂之晩暮 而震志愈篤 後有冠雀銜三鱣魚 飛集講堂前 都講取魚進曰 蛇鱣者 卿大夫服之象也 數三者 法三台也 先生自此升矣

(湖州에서 客居하며 있을 적에, 州郡禮命을 받지 못하기를 수십년이나 되어 뭇 사람들이 그에게 이제는 늦었다고 말하였지만 그럴수록 양진은 더욱 돈독히 공부만 하였다. 나중에 어느 날 관작새가 전어 세마리를 물고 강당 앞에 날아와 앉으니 도강이 그것을 잡아다 양진에게 바치면서 사뢰기를 ; 蛇鱣魚는 빛깔이 경대부의 복색과 같고 또 숫자가 세마리인 것을 보면 三台卿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 길조를 보면 선생께서는 앞으로 벼슬이 높아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다. 詔立都講祭酒 以敎學諸子

(都講祭酒를 세워 여러 公子들을 가르치도록 조칙을 내렸다)

      라. 中書博士張天龍講尙書 選爲都講 生徒悉集 瑩夜讀書勞倦 不覺天曉 催講旣切 遂誤持同房生趙郡李孝怡曲禮卷上座 博士嚴毅 不敢還取 乃置禮於前 誦尙書三篇 不遺一字 講罷孝怡異之 向博士說 擧學盡驚

(중서박사 장천룡이 尙書를 강의하는 자리에 그가 뽑히어 都講이 되었는데, 생도들이 많이 모였다. 祖瑩은 밤늦도록 책을 읽느라고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가 아침이 되어 강의시간이 다가오자 시간에 쫒기어 급히 尙書 책을 가지고 간다는 것이 그만 同房生 李孝怡曲禮 책을 들고 가서 도강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강사 방천룡은 엄한 분이라서 조영은 다시 가서 책을 바꿔 오지도 못하고 할 수 없이 곡례 책을 놓고서 진행을 하였는데, 상서 세편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었다. 강의가 끝나고 李孝怡는 매우 신기하게 여겨 그 사실을 장천룡 박사에게 이야기하자 마침내 소문이 퍼져 학교 안 모두가 다 놀라와 했다.

      마. 甚明禮 兼通左氏春秋 少時恒爲李寶鼎()都講 後亦自有徒衆

禮記에 밝았고 左傳에도 밝았다. 어려서는 늘 이보정의 도강 노릇만 하였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가르쳐 그에게 배우는 사람도 있었다.

      바. 洙積思經術 吳郡朱异會稽賀琛甚嘉之 及异琛於士林館講制旨義 常使洙爲都講

심수는 경학에 깊은 조예가 있어 오군의 주이와 회계의 하침이 그를 매우 가상히 여기었다. 주이와 하침이 사림관에서 강의를 할 적에는 늘 심수로 하여금 도강 노릇을 하도록 하였다.

 

  (2) 講經儀式

<入唐求法巡禮行記>敦煌寫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赤山院 講經儀式 : 辰時打講經鐘 打驚衆鐘訖 良久之會 大衆上堂 方定衆鐘 講師上堂 登高座間 大衆同音 稱嘆佛名 音曲一依新羅 不似唐音 講師登座訖 稱佛名便停 時有下座一僧作梵 一據唐風 卽云何於此經等一行偈矣 至願佛開微密句 大衆同音唱云 戒香定香解脫香等頌. 梵唄訖 講師唱經題目 便開題 分別三門 釋題目訖 維那師出來於高座前 讀申會興之由 及施主別名 所施物色申訖 便以其狀 轉與講師 講師把麈尾 一一申擧施主名 獨自誓願 誓願訖 論議者論端擧問 擧問之間 講師擧麈尾 聞問者語 擧問了 便傾麈尾 卽還擧之 謝問便答 帖問帖答 與本國同 但難儀式稍別 側手三下後 申解白前 卒爾指申難 聲如大瞋人 盡音呼諍 講師蒙難 但答不返難 論議了 入文讀經 講訖 大衆同音長音讚嘆 讚嘆語中有廻向詞 講師下座 一僧唱處世界如虛空偈 音聲頗似本國 講師昇禮盤 一僧唱三禮了 講師大衆同音 出堂歸房 更有覆講師一人 在高座南下座 便讀講師昨所講文 至如含意句 講師牒文釋義了 覆講亦讀 讀盡昨所講文了 講師卽讀次文 每日如斯

  (赤山院講經儀式 : 辰時에 강경을 알리는 종을 치는데, 여러 종을 크게 친다. 얼마 안 있어 대중들이 강당으로 들어가는데 그러면 종소리가 맞는다. 강사가 강당으로 들어와서 고좌로 올라가는 동안 대중들은 한소리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 소리는 한결같이 新羅音이지 唐音 같지 않다강사가 자리에 오르면 佛名號를 외던 소리는 곧 그치고, 그때 아랫자리에 있는 한 승려가 범패를 한다. 범패는 당나라 풍으로 하는데 云何於此經등의 句節이 나오는 偈頌이다. 게송이 願佛開微密에 이르게 되면 대중이 함께 戒香 定香 解脫香등을 부른다. 범패 부르기가 끝나면 강사가 경전제목을 하고서 곧 開題에 들어가고 또 경전본문에 대한 三門分別도 한다. 경전제목의 해석이 끝나면 維那師가 나와서 고좌 앞에서 그 날 모임이 이루어지게 된 연유와 시주의 이름과 그리고 시주한 물건의 내역을 밝힌다. 다 마치고는 바로 그 내용을 적은 글을 강사에게 갖다 주면 강사는 주미를 쥐고서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그들 각자에 대해 낱낱이 서원을 해준다. 서원이 끝나고 나면 논의자가 논단을 들어 질문을 하는데, 질문하는 동안 강사는 주미를 들고서 질문자의 물음을 듣는다. 질문이 끝나면 주미를 내렸다가 다시 들고서 대답하는데, 묻고 물러나는 謝問에는 곧바로 답해주고 試帖으로 물으면 試帖으로 답해주는 것이 우리나라와 한가지이지만 의 의식만큼은 조금 다르다. 손을 기울여 세번 내린 뒤 사뢰는데, 느닷없이 을 묻는 그 소리는 마치 화난 사람이 목청껏 다투듯 소리가 크다. 강사는 을 받으면 을 해줄 뿐이지 을 되돌리지는 않는다. 논의가 끝나면 경문으로 들어가 독경을 한다.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이 모두 끝나면 대중이 함께 긴소리로 찬탄을 하는데, 찬탄의 내용에는 모임이 끝났음을 알리는 내용인 廻向詞도 들어 있다. 강사가 고좌에서 내려오면 한 승려가 處世界如虛空이란 게송을 창하는데, 음세가 자못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그 다음) 강사가 (대중들로부터) 절을 받는 곳인 禮盤으로 올라가면 한 승려가 강사에 대하여 세번 절할 것을 창하는데, 대중이 함께 세번 절을 한다. 강사가 법당을 나가 승방으로 돌아가면 다시 覆講師 한 사람이 남쪽 高座로 올라가 강사가 어제 강한 내용을 말하는데, 會意句 같은 것도 강사가 첩문으로 뜻을 풀어 놓은 것을 복강사도 그대로 다시 읽는다. 복강사가 어제 강한 것을 다 읽고 나면 강사는 다음 글부터 읽게 되는데 매일 이와 같이 행한다.)

 

      昇座已了 先念偈 焚香 稱諸佛菩薩名 (中略) 凡是聽法 必須求哀 發露懺悔 先受三歸 次請五戒 方可聞法 增長善根 然後唱經 必獲祐福

(강사가 高座에 오르면 먼저 偈頌念誦하고 분향을 하며 諸佛菩薩의 이름을 왼다. (중략) 무릇 法門을 듣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법을 구하고자 하는 애절한 마음이 일도록 하고, 그 다음 지난 날의 죄를 참회한 다음 三寶歸依하는 를 올리고, 그 다음 五戒를 청하여 받아야 비로소 법을 들을 수 있고 마음 속에 善根이 커지게 된다. 이런 다음에 경문을 부르면 반드시 복을 얻게 된다.)

 

그리고 돈황사본 P.3849문서와 S.4417문서에도 강경의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P.3849문서에는 講經대신 俗講이라고 기록된 점이 좀 다를 뿐이다.

 

      夫爲俗講 先作梵了 次念菩薩兩聲 說押座了 素舊溫室經 法師唱經題了 念佛一聲了 便說開經了 便說莊嚴了 念佛一聲 便一一說其經題字了 便說經本文了 便說十波羅蜜等了 便念念佛讚了 便發願了 便又念佛一會了 便廻向發願取散云云 已後便開維摩經 講維摩 先作梵 次念觀世音菩薩三兩聲 便說押座了 便素唱經文了 唱日法師自說經題了 便說開讚了 便莊嚴了 便念佛一兩聲了 法師科三分經文了 念佛一兩聲 便一一說其經題名字了 便入經說緣由了 便說念佛讚了 便施主各發願了 便廻向發願取散

(무릇 俗講을 할 때에는 먼저 범패를 하고, 다음 보살명호를 두번 부른 다음 압좌문을 설한다. 온실경을 素唱하는데 법사가 경전의 제명을 창한다. 염불 한 번 한 다음 곧 開經을 한다. 장엄을 설하고는 또 염불 한 소리를 하고, 곧 일일이 그 경전제목의 글자 하나하나를 해설한다. 경전본문을 설명하고는 十波羅蜜 등에 대하여 설명한다. 念佛讚하고는 발원을 한다. 또 염불을 한번 하고 회향발원을 하고는 헤어진다. 이후에 곧바로 維摩經을 열어 강의를 하는데 먼저 범패를 하고 관세음보살을 두어번 한다. 압좌문을 설하고는 경문을 창한다. 唱日法師가 경전의 제목을 스스로 설명하면 開讚을 설하고 장엄을 한다. 염불 한 두 소리를 하고 법사는 경전의 본문을 序分正宗分流通分의 셋으로 나누어서 科判說明을 한다. 다시 염불 한 두소리를 하고 경전의 제명을 한 글자 한 글자씩 설명한 다음 경전을 강설하게 된 연유의 설명에 들어간다. 염불찬을 설한 다음 施主들이 각기 발원을 하고 회향의 발원을 한 뒤 헤어진다.)

 

       []梵了 次念菩薩兩聲 說押座了 []聲了 便說開經了 便說[] 便發願了 便又念佛一會了 [] 夫爲受? 座 先啓告請諸佛了 便道一文表題 [] 便說講戒卄( )事科了 便說八戒了 [] 便結緣念佛了 廻向發願取散

講維摩 先作梵 次念觀世音菩薩三兩聲 便說押座料 [](便素)唱經文了 唱日法師自說經題了 便說開讚了 便[](莊嚴了) 便念佛()兩聲了 法師科三分經文了 念佛一兩聲 便一[](一說)經題名字了 便入經說緣喩了 便說念佛讚()

([]범패를 한다. 다음 염보살 두어 소리 하고 압좌문을 설한다. []開經을 한다. []경전의 제목 글자를 설명하고 경전의 본문을 설명한다. []발원을 하고 또 염불을 한차례 한다. []무릇 법을 들으려면 먼저 諸佛하여 하고 경전의 表題를 말한 다음 []( )가지의 하고 八戒하며 []염불의 結緣을 한 다음 회향발원을 하고 헤어진다.

유마경을 강하는데 먼저 범패를 하고 관세음보살을 두어 소리 한 뒤 압좌문을 설한다. []경문을 한다. 창일법사가 경전의 제목을 설명한다. 개찬을 한다. []염불 두어 소리를 한다. 법사가 경문을 正宗流通三分으로 科判하여 설명한다. 염불 한 두 소리 한다. []경전설법의 연유를 말하고 염불찬을 설한다.)

 

일일강 강경의 의식절차 또한 <入唐求法巡禮行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일일강의 강경이라고 해서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의식절차 또한 비슷하다.

 

      新羅一日講儀式 : 辰時打鐘 長打槌了 講師都講二人入堂 大衆先入列坐 講師讀師入堂之會 大衆同音稱嘆佛名長引 其講師登北座 都講登南座了 讚佛便止 時有下座一僧作梵 云何於此經一長偈也 作梵了 南座唱經題目 所謂唱經長引 音有屈曲 唱經之會 大衆三遍散花 每散花時 各有所頌 唱經了 更短音唱題目 講師開經目 三門分別 述經大意 釋經題目竟 有維那師 披讀申事興所由 其狀中具載無常道理 亡者功能 亡逝日數

(新羅一日講儀式 : 辰時을 치는데, 길게 치고 나면 講師都講 두 사람이 법당으로 들어온다. 대중들은 먼저 들어와서 줄지어 앉아 있는데, 講師都講이 법당으로 들어오는 동안 한 소리로 불타의 이름을 길게 뽑아 부른다. 강사가 북쪽 자리에 오르고 도강이 남쪽 자리에 오르면 찬불은 곧 멈추고, 그때 아랫자리에 있는 한 승려가 梵唄를 하는데, ‘云何於此經이라는 긴 偈頌이다. 범패가 끝나면 남쪽자리의 도강이 경전제목을 한다. 그것이 이른 바 唱經長引이라는 것으로 소리에 굴곡이 있다. 창경하는 동안 대중은 세번 산화하는데, 산화할 때마다 각각 하는 바가 있다. 창경이 끝나면 다시 短音으로 제목을 창한다. 강사는 경전제목을 開題 解釋하고, 三門으로 나누어 경전의 대의를 서술한다. 경전제목의 해석이 끝나면 維那師가 모임의 연유를 (적은 글을) 펼쳐 읽는데, 그 글에는 무상에 대한 도리와 죽은 이의 공능, 죽은 날짜 등이 다 실려 있다.)

 

4. 講經俗化講唱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은 강경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경전의 旨義講說한다는 본래의 취지는 퇴색하고 점점 세속적인 집회행사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唐代 쯤이면 강경은 사찰에서 거행하는 통속적인 모임의 대명사로 바뀌어지게 되고, 사찰에서 실제 거행되는 강경들은 대개 사찰의 재정적인 소요를 충당하려는 목적의 모임으로 진행되는 것이 상례였다. 강경이 이렇게 속화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는데, 에서는 그 배경과 원인들을 대체로 살펴본 다음 통속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새로운 양식인 講唱이란 것에 대하여도 살펴 보기로 하자.

 

(1) 講經俗化

    가) 통속화의 문화적 배경

  강경이 통속화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중국불교의 문화적 배경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으로 본다. 宗派佛敎로 상징되는 중국불교의 문화적 특징은 교단의 세속화 또는 권력지향의 노력이 바로 중국불교사의 전과정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세속적인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도불교라고 해서 그러한 성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중국보다 못하지는 않는다. 석가모니의 입멸후 인도불교 교단의 세속화는 교단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결과를 낳을 정도였고, 중국인들 또한 처음 불교를 받아들일 때 그것이 현실적인 도움이 있거나 아니면 내세에라도 도움이 된다면 선호한다는 자세이었기 때문에 역시 그 정도가 인도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래서 功德이란 두가지 덕목은 禪宗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중국불교에 있어서 가장 큰 명제이었고, 따라서 중국의 불교도는 이 두가지 명제를 향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니 진정 이 두가지를 향한 노력보다 덜 세속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가장 세속적인 가치가 가장 훌륭한 가치로 전도된 이와 같은 중국불교의 상황에서, 依經講經은 그래도 경전의 문구를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지라도 본래의 취지가 덜 흐려질 수 있었지만, 대중적인 행사로 치러졌던 일일강은 사원의 다른 행사와 마찬가지로 세속화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 唱導와의 關係

  사찰의 집회가 속화되는 데에 보조적인 원인은 唱導라는 것이 사찰의 집회에 끼어들어 나중에는 점차 그것이 집회의 주요행사가 되버린다는 사실이다.

  齋會중심의 중국불교에서 생겨난 창도는 轉讀梵唄講經 등과 결합하여 나중에 說唱이라는 寺院文藝의 틀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초가 될 뿐 아니라 俗講이란 이름으로 唐代의 사원에서 진행되던 講唱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따라서 唱導가 갖는 그와 같은 성격때문에 講說을 잘하는 승려들은 누구나 唱導僧이 될 수가 있었고 또 자연 一日講을 잘하는 講經法師 가운데에도 창도를 잘하는 이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僧傳을 보면 講經唱導를 합하여 講導라고 부르기도 하고 談講이라는 표현도 나오며 심지어 강경을 잘하는 승려들의 전기를 모은 과목에서 劇談을 잘한다는 표현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

  창도는 말하는 내용을 위주로 하는 과목이 아니라 聲唱에 더 의지하는 과목이다. 그러나 導文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몇몇의 기록들은 창도의 실제 공연내용과 부합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느 정도 창도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창도에 대하여 이해를 높힌다면 강경이 流變하는 과정을 알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중국불교의 사원에서 생겨나는 갖가지 文藝樣式에 대하여도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 俗講

  俗講이란 말은 低俗講經이나 通俗的講經이란 뜻이 아니라 道俗또는 僧俗을 대비시킬 때의 이란 뜻으로서 對俗講經僧侶가 아닌 一般俗人들을 상대로 한 講經이란 뜻에서 생겨난 말이다. 따라서 강경에 통속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依經講經이 있었듯이 강경이 속강으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해서 속강이 모두 경전과는 동떨어진 통속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돈황사본 가운데 섞여 있는 講經文變文 話本 등을 설명할 때 講經文講經의 기록이고 變文 話本 等俗講의 기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속강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도 많다. 이는 바로 사원의 속강이 대중적인 연예와 가깝게 다가섰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그것은 長安戱場多集於慈恩 小者在靑龍 其次薦福永壽 尼講盛於保唐 名德聚於安國(장안의 희장은 자은사에 많이 몰려 있는데 작은 것은 청룡사에, 그 다음은 천복사와 영수사에 있다. 尼僧의 강경은 보당사가 성행하였고 이름난 승려들은 안국사로 몰려 들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데, 여기서의 戱場은 바로 대중적인 연예가 공연되는 장소를 말한다.

 

  (2) 講唱의 발달

   

    가) 講經講唱

  講唱이란 말로 서술하는 과 노래로 서술하는 이 번갈아 나오는 문학양식을 가리키는 中國文學의 용어인데,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판소리처럼 읽는 문학으로서의 기능보다 상연되는 公演藝術로서의 기능에 중점을 두는 예능이다. 그래서 이것의 臺本을 놓고 보면 散文說部韻文唱部가 번갈아 나오기 때문에 그 문체적 특징을 들어 說唱이라고도 이름한다. 실제 강창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방법이 없다. 다만 돈황사본 속에 남아 전해지는 唐代講唱臺本들을 통하여 강창의 素材形式이 어떠했는지를 대강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講唱俗講으로 불리우던 講經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寺院을 중심으로 하여 상연되고 성행하였던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 敦煌講唱

講經의 통속화 정도를 알아보고 또 講唱講經과의 관계를 살피는 데 있어서도 敦煌寫本은 역시 중요한 자료이다. 왜냐면 돈황사본 가운데는 다른 곳에 있지 아니한 강경과 강창의 기록들이 다수 있기 때문이다.

돈황사본 속에 있는 강창 자료는 내용상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講經文처럼 講席에서 진행한 것이 분명한 것으로 불교경전이나 교리를 설명하는 내용이고, 또 하나는 내용도 불교적인 소재가 아닌 통속적인 내용에다 형식마저 도저히 講席에서 진행한 것으로 추정하기는 어려운 여러가지 양식을 하고 있는 것들이다. 전자의 경우 강경이 분명하지만 후자의 경우 文字記錄 만으로는 그 종류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식과 내용이 다양하다. 話本小說의 형식을 한 것이 있는가 하면 라는 題名이 직접 쓰인 俗賦들도 있고, 臺本인 듯 순전히 韻文만으로 일관한 것도 있으며, 變相의 어원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이라는 題名이 있는 글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寫本이 나오게 되는 이유는 寺院에서 치러졌던 講唱에서 상연된 내용이 그처럼 다양했기 때문이랄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다양한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단일한 쟝르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강창이란 이름하에 사찰에서 상연되어졌던 것은 단일한 쟝르가 아니라 口辯이 사용되는 온갖 雜技傳統演藝는 모두 다 上演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5. 맺음말

 

禪宗이 일어나서 모든 문제의 중심을 自己로 삼고, 아울러 그에 대한 哲理的 탐구와 확철한 해답을 얻으려는 진지한 분위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중국불교의 가장 큰 줄기는 經典에 대한 敎學이었다. 그리고 선종이 본래의 정신을 망각한 채 祖師들의 公案만 붙잡고서 허탄한 미몽에 빠져 있을 때 그것을 깨우쳐 주는 것 또한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들여다 보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敎宗이니 禪宗이니 하는 宗派를 떠나서 敎團을 유지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역시 내외에 불법을 가르치는 일이다. 이런 일을 중국불교에서는 전래로 講經이라 불렀는데, 이 강경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講經語義經典講說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초기부터 사찰에서 경전을 강설하기 위한 모임을 따로 마련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초기에는 대중적인 집회에서 기초적인 敎理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시작하였는데, 그런 대중적인 집회는 印度에서부터 유래한 라는 모임이었다. 이 재에서 교단이 필요로 하는 모든 행사가 이루어졌으므로 자연 재는 절에서 모이는 집회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재에서 진행하는 행사 가운데 기초적인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마련되기도 하고 또 모임의 지루함을 파하기 위한 唱導라는 과목도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대승경전들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대승경전에는 하나같이 本經受持讀誦書寫解說하는 것이 수승한 공덕이 된다고 쓰여져 있었다. 그래서 강경은 본격적으로 교단 내외에서 유행하였고 또 그 결과로 많은 주석서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경전의 유행은 사찰에서의 집회에 경전을 강의하는 시간을 더 할애하도록 만들었고, 사찰은 따라서 모든 집회에 강경을 포함시키기도 하고 독립적인 강경회를 자주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唐代 무렵이면 국가에서 왕의 칙명으로 강경을 열게도 하였으니 그것은 對俗講經이란 뜻에서 俗講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강경이나 속강은 세인들에게 사찰의 집회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인식되기도 한다.

 

  강경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경전의 문구에 따라 일일이 해석해 나가는 依經講經이다. 또 하나는 行事로서 치러지는 형식적인 것으로 本考에서 一日講이라고 명명한 것인데, 이것에는 經典題名을 걸고서 행하기는 하되 제목만 해석할 뿐 원문은 대강 읽고만 마는 것이 있는가 하면 경전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佛法理致만을 설명하는 것도 있다. 강경의 진행은 講師都講의 구분이 있어 都講經文하면 그에 대한 설명을 講師가 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如法儀式節次가 요구된다.

  講經은 시대가 흐를수록 俗化하는데, 俗化하는 원인으로는 중국의 문화적 배경과 강경 자체의 한계를 들 수 있다. 강경 자체가 속화하기도 하지만 강경은 이미 사찰집회의 대명사이기도 한만큼 사찰집회가 속화하는 것을 강경이 속화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국불교의 독특한 특징인 唱導가 사찰집회에서 성행하여 그것이 강경과 섞이게 되는 것도 강경이 속화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敦煌에서 발견된 俗文學분야의 文書들은 바로 강경이 속화하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중국 講唱文學祖型이 되는 것들이 講經의 기록인 講經文과 함께 사원에서 발견된 것은 講唱講經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것이 講經이나 俗講에서 講唱上演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여기는 것은 무리이고, 이것은 世俗의 모든 演藝쟝르가 寺院을 중심으로 하여 공연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만큼 中國佛敎世俗과 가까웠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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