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04 작성>
먼저 두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첫째는, 예산 사람한테서 들은 이야기이다. 식구들이 밥 먹고 있을 때 손님이 오면 진지 드셨느냐고 당연히 묻는단다. 그러면 밥을 먹지 않았으면서도 반드시 "먹었시유." 한단다. 한두 번 더 청해도 여전히 "먹었시유." 한단다. 그러다 식구들이 밥상을 물리려고 할 때쯤이면 다가와서 "어디 한 술 떠볼까유?" 한단다.
둘째 이야기는 내가 직접 겪은 바이다. 언젠가 속리산 옥량동에 바람 쏘이러 간 적이 있었다. 차를 아래에 세우고 걸어 올라가 옥량폭포를 구경한 다음 위에 있는 절의 계곡에 앉아 물을 적시고 있는데 산에서 중년 남자 두 사람이 내려온다. 행색으로 보아 버섯 따는 사람이 분명했다. 땀에 절어 있는 모양새도 그렇지만, 버섯을 따자면 길 아닌 곳만 다녀야 하니 무척 힘이 들었을 것은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갑자기 걸음을 돌려 다가오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 옥량동이라고 했더니, "아이구 큰일났네, 길을 잘못 내려왔어. 우리 차 놔둔 곳까정 가자면 5킬로는 더 걸어가야 하는디, 워쩐디야." 하면서 멈칫멈칫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다.
이 두 이야기는 비단 충청도의 경우뿐 아니라 우리네 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패턴이다. 밥을 안 먹었으면서도, 먹었지만 한 술 떠보겠다는 형식을 취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달라고 해서 먹으면 갚아야 할 빚이 되지만 권유에 응해주는 형식을 취하면 빚은 아닌 것으로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걸 '한국인의 은근한 정 운운' 하는 식으로 해석하면 정말 곤란하다. 멀쩡하게 잘 내려오던 사람이 갑자기 여기가 어딘 줄 모르겠다느니 하면서 밍기적거리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차를 태워 줄 의향이 있는지 떠보는 수작이다. 아니, 상대가 차를 태워주겠다는 말을 내뱉도록 유도하는 적극적인 수작이다.
밥을 달라거나 차를 태워달라는 의사표시를 왜 떳떳하게 하지 않을까? 그것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베풀음을 받고자 하는 수작이기 때문이다. 떳떳한 거래, 즉 교역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서 나온다. 왜 우리는 교역에 익숙하지 않은가? 교역은 '바꾸기'이다. 바꾸려면 바꿀 대상의 가치가 비슷해야 할 뿐 아니라 상대 또한 나와 대등한 객체로 인식해야 한다. 대등하지 않은 상대와 대등하지 않은 가치를 바꾼다는 것은 뺏는 짓이다. 빌리는 형식을 취하는 약탈도 있다. 돌려줄 능력이 없거나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빌리는 형식을 취한다. (이는 요즘 관념으로는 엄중한 사기행위이다).
우리 역사는 근대 이전까지는 다층적인 지배피지배 구조가 점점 고착화된 역사였다. 대등한 인간관계를 설정하는 연습이 너무 부족했다. 남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능력의 우월이 아니라 계급의 우월에만 젖어왔다. 하다 못해 나이로라도 계급을 두었다. 그래서 남을 누르고 호령하고 뺏는 데에서만 만족을 느꼈지 상대를 나와 대등하게 존중하거나 상대에게 베푸는 일에 가치를 두어 본 경험이 드물다. 두레나 품앗이 같은 농촌의 공동체의식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그것은 동병상련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같은 고통을 받는 자끼리의 '공평'에 합의한 지혜이지 각자의 권리에 기반한 관념은 아니다. 계급에 대한 반성과 부정을 철저하게, 능동적으로, 부정한 경험도 없다. 한 마디로 계급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다.
이런 문화에서 교역이 발달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페어플레이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대등한 양자의 거래'가 기본인 상업은 발달하기 어려울 수 있다. 분명한 주고받음,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대등한 인간관계의 설정,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지탱해 줄 주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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