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탬이 됨’, ‘쓸모 있음’으로 번역되는 利는 한자문화권에서 단연 최고의 가치입니다. 다만 利는 ‘쓸모 있음’(Utility)으로 번역되기는 하지만, 쾌락과 행복만을 진정한 가치로 여기는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다릅니다. ‘利’가 칼로 곡물을 수확하는 모습에서 만들어진 글자임을 보더라도, 利는 구체적인 효용을 가리킬 뿐 쾌락이니 행복이니 하는 추상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논어』에 보이는 공자 사유의 토대도 實利(실제적인 보탬)와 實用(실제적인 쓰임)입니다. 공자는 정치에 종사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因民之所利而利之”(인민이 이롭게 여기는 것을 이롭게 만들어줌)(20·02)하라고 강조합니다. 정치의 대원칙은 바로 그것이라는 가르침이지요. 다만 공자는 利에만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는 경계도 요모조모로 주문합니다. “放於利而行多怨”(이익만을 좇아 처신하면 원망이 많아진다)(4·12),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군자는 의를 밝히고, 小人은 利를 밝힌다)(4·16), “無欲速 無見小利 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빨리하고자 하지 말고 작은 이익에 눈 돌리지 말거라. 빨리하고자 하면 도리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고 작은 이익에 눈 돌리면 큰 일을 이룰 수 없다)(13·17), “見利思義”(이익을 마주하면 그것을 내가 챙기는 것이 옳은지 생각하라)(14·12) 등의 발언이 그것입니다. 利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따라야 하지만 경계 또한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공자에 이어 등장한 사상가 묵자(486~376BCE)는 利에 대한 추구가 善이라고까지 강조합니다. 제자들에 의해 어록만 남은 공자와는 달리 묵자는 자신의 사유를 정리한 글을 남겼는데, 거기에서 묵자는 ‘겸상애 교상리’(兼相愛 交相利:모두 서로 사랑, 섞여 서로 이득), ‘흥천하지리 제천하지해’(興天下之利 除天下之害:모든 이익은 일으키고, 모든 해로움은 없애자)를 강조합니다. 공자가 利를 부정했다고 여긴 나머지 그처럼 강조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실리와 실용만이 제일의 가치라는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묵자는 겸애 외에도 비공(非攻:전쟁 반대), 절용(節用:소비 절약), 상현(尙賢:능력 숭상) 등 지극히 실제적인 주제 열 가지를 편명으로 삼아 각각 설명하는데, 각 편은 모두 利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충족시켜야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을 누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묵자도 휴인자리(虧人自利:남을 헤치면서까지 자신을 이롭게 만듦)를 경계시키기는 합니다.
그런데 공자를 사숙했다고 자부했을 뿐 아니라 후대 유자들에 의해 공자 다음의 성인으로 추앙되는 맹자(372~289BCE)는 利를 폄하하는 발언을 크게 내세웁니다. 『맹자』 첫머리에서 그는 “何必曰利”(왜 利부터 말해야 합니까)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상하 모두가 義를 뒤로 하고 다투어 利만을 앞세우게 되면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하는 위태로운 나라가 된다. 그러니 仁義를 앞세워야 한다. 仁義는 天理의 公이고 利心은 人欲의 私이다. 天理를 따르면 利를 구하지 않아도 이롭지 않을 수 없고, 人欲을 따르면 利를 얻지도 못하면서 害만 따르게 된다.” 지극히 관념적이고 유심주의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맹자의 그러한 주장은 사마천(145~86BCE)의 칭송을 거치고 조기(趙岐,108~201)의 주석을 거치면서 유가의 입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주희(1130~1200)를 비롯한 송대 유학자들을 거치면서는 유교체제의 교조로 자리 잡게 됩니다. 송대의 섭적(葉適,1150~1223)이나 진량(陳亮,1143~1194)과 사상가는 실제의 쓰임과 효과를 중시하면서도 말로만 公利와 性命을 논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반대한다는 견해를 발표하기도 하지만, 그런 견해가 크게 힘을 얻지는 못합니다.
실리와 실용을 중시했던 공자로서는 당연히 손실과 위험에 대한 대비도 강조합니다. 공자는 ‘邦有道에는 어떻게 처신하고 邦無道에는 어떻게 처신하라’는 발언을 자주 하였는데, 그 메시지는 위험에 대비하라는 주문입니다. 그가 강조했던 知(분별력)도 결국 출발점은 위험이나 손실에 대한 예지 능력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권위주의 사회가 주는 엄혹한 위험에 대해서도 경계시킵니다. “居安思危 思则有備 有備無患”(편안할 때 위난을 생각해야 하고, 생각한다면 대비해야 한다. 대비가 있어야 환난을 겪지 않게 된다)이라는 『좌전』의 구절이나, “호환(虎患)보다 폭정이 더 가혹하다.”라는 『례기·단궁하』의 구절이 그 사례입니다. 이처럼 실익을 추구하면서 손실과 위험에 대비하자는 공자와 유자들의 발언은 한자문화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공자는 “仁者安仁 知者利仁”(인자는 인을 편안한 것으로 여기고, 지자는 인을 이로운 것으로 여긴다)(4·02)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대개의 주석은 ‘利仁’을 ‘이로울 때만 仁을 행한다’라고 새깁니다. 그런 해석은 지자를 이로울 때만 인을 실천하는 기회주의적인 사람으로 보고서 인자보다 낮은 단계로 여기는 계급적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자가 인자와 지자를 대비하여 말한 것은 그 둘의 우열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군자가 되려면 仁과 知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말입니다.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지자는 물을 즐기고 인자는 산을 즐긴다.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다. 지자는 즐거움을 누리고 인자는 수를 누린다)”(6·23), “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분별력은 미혹하지 않게 만들고, 인은 근심하지 않게 만들며,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다)”(9·29) 등의 발언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공자는 세 부류의 사람을 설명한 게 아니라 세 부류의 기질을 말한 것입니다. 『례기·表記』의 “仁者安仁 知者利仁 畏罪者强仁”(인자는 인을 편안하게 여기고, 지자는 인을 이롭게 여기며, 죄를 두려워하는 자는 억지로 인을 실천한다)이라는 문장도 仁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후대 유자들은 공자가 仁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한 사실이나, “放於利而行多怨”(4·12),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4·16)처럼 利를 경계시키는 발언을 한 사실만을 근거로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利는 중국문화에서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가치입니다. 중국인들은 인간의 행위에 利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여깁니다. 픽션을 만드는 능력, 그러니까 추상화하는 능력까지도 利 때문으로 간주합니다. 단지 즐거움만을 위한 픽션은 있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허구나 픽션을 곧잘 남을 속여 개인의 이익을 취하려는 행동으로 보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송 이후 유자들은 리학(理學)을 강조하면서 利를 뒤로 하고 義를 앞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태도는 “군자에게는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취해야 할 義가 있다.”는 맹자의 태도와 연결되는데, 그것은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4·16)라는 공자의 말에 힘입었을 것입니다. 공자는 義라는 가치의 표준을 제시하고자 利를 견준 것이지 利를 폄하하고자 견준 것은 아닙니다. “仁愛也 義利也 愛利此也 所愛所利彼也(인은 아끼는 것이고 의는 이로운 것이다. 아낌과 이로움, 그리고 아낌 받고 이로움 받는 것, 이 둘은 별도이다)”(『묵자·경설하(經說下)』)라는 묵자의 말도 공자의 생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공자의 말을 교조로 받아들이거나, 교조주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만이 利를 버리고 義를 취하라고 요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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