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록영종(福祿永終)
오래 버티는 것이 확실한 승리요 유일한 소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생을 간고의 세월로만 보내야 한다면 그다지 살 맛이 나지는 않을 게다. 그래서 천장지구를 바란 다음에는 그 위에 반드시 추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복과 록(우리말의 두음법칙이란 정말 무효하다. 당장 없애야 할 법칙이다)이다.
복과 록은 무엇인가? 오복(五福)이니 팔복(八福)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복이란 것이 마치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원리처럼 착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복과 록’이란 ‘돈과 지위에 따른 각종 이득’ 외에 다름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복을 다섯 개쯤 차례로 주어 섬기고는 오복이라고 이름하고, 그것만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아 세 개쯤 더 주어 섬기고는 팔복이라고 이름했을 뿐이지 그런 것이 무슨 원리가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오래 살면서 지위도 얻고 돈도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니, 그야말로 달고도 큰 참외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수(長壽)와 복록(福祿)은 늘 함께 따라 다니는 중국인의 소망이 되어, 바닥에 까는 자리며 덮는 이불이며 가구며 먹는 숟가락과 젓가락에도 ‘수(壽)’자와 ‘복(福)’자는 언제나 셋트로 따라 다니는, 거의 부적과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는 이처럼 절대절명인 수와 복을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살벌하게 싸워도 누가 탓하지 않았다. 자신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좀 지저분할지라도 수복을 길이 누리는 사람을 부러워했지 짧게 살더라도 맑고 향기롭게 산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는 결코 없었다. 짧게 살다 간 이들에게는 단지 애달프게 생각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간혹 의로운 삶을 산 사람을 칭송하기도 하지만 그 의로움이란 것도 대개 주인에 대한 충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지 당자의 삶 자체를 두고서 평가하는 관념은 아니었다. 이처럼 장수 외에 또 한 가지 반드시 필요한 염원을 문자로 표현한 것이 바로 ‘복록영종’이니, 그것은 ‘돈과 지위에 따른 각종의 이득이 길이길이 이어지라’는 뜻이다.
요즘 세상이라고 해서 복록을 추구하는 짓을 탓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복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태도만큼은 예전과 달라야 한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복록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신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해 뛰는 사람들과 그것을 얻게 된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짓들이 모두 양해되었지만, 이제 우리는 신분제 사회의 질곡됨을 잘 알고서 그것을 거부하기로 했고 또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지위를 수평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즉 인간의 권리는 누구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승인하고 있다. 그러니 각자 복록을 구하는 노력은 하되 약속한 룰만큼은 잘 지키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신분제 사회의 관념과 구습대로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살 맛 안나게 만드는 이들이 많은 것, 이것이 한자문화권의 문제이다.
현재의 중국은 과거 신분제 사회와 비교할 때 바뀐 것도 많지만, 개인의 복록추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도무지 공산당이 통치하는 나라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옛날과 변함없다. 과거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는 해군함대를 마련할 자금을 가져다 이화원이란 궁정정원을 만들어 버렸지만 요즘(2004년)의 해군은 자동차 밀수를 한단다. 중국 사람들의 이런 행동을 보고 웃을 만한 우리도 아니다. 오늘 날 우리네 사는 모습에도 이와 유사한 웃지 못 할 일들이 많다. 심각한 것 하나만 예를 들자면 풍수(風水)와 같은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다.
풍수란 살필만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신과 후손의 발복(發福)을 위해 풍수를 살핀다면 그것이 코미디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발복과 같은 바램을 가진다면 풍수와 같은 천지의 소관사를 살필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소관사부터 살피는 것이 옳지 않은가. 근면이라든가 지혜라든가 성실과 같은 것들을 다 살핀 다음 혹 마지막으로 풍수라든가 천지신명에의 귀의 같은 것까지 살핀다면 갸륵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 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에서나 필요한 것이 풍수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영을 반드시 명당에다 쓰겠노라고 이리저리 이장하며 다니는 이들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많다. 그것이 가신 분에 대한 추념이라면 그래도 가상하기나 하겠지만, 자신과 자손의 발복을 위한 속내라면 얼마나 한심한 욕망인가. 자손의 현달을 바란다면 자식을 바르게 가르칠 일이요, 자손을 바르게 가르치자면 자신의 삶부터 맑게 닦을 것이지 왜 조상의 묘자리에다 모든 것을 건단 말인가. 미신에라도 의지해야만 하는 배우지 못한 백성들이 이런 짓을 한다면 혹 모르거니와 좀 배웠다는 중산층에서부터 국정을 책임지는 사람들까지 한결같이 풍수에 탐닉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무슨 도사니 무슨 진인이니 하는 이들을 모시고 다니지를 않나, 풍수를 마치 회복해야 할 우리 전통문화의 한 가지인 양 언론에다 떠들어대는 지리학자가 있지를 않나,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인사를 다했으니 풍수를 찾는 것이라고? 그랬다면 풍수를 따지지 않는 나라보다 열차며 배와 비행기는 왜 사고가 더 많고 다리는 왜 무너지나? 풍수란 세상살이와 인연을 비교적 덜 가진 이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는, 그나마도 원리라고 할 성질이 아닌, 순전히 결과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관념론적 차원에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 해석을 읽게 되면 재미있고 신기하기는 하다. 하지만 풍수가 마치 현실을 주재하는 강력한 힘처럼 사람들 사이에 전파되는 것은 순전히 탐심 때문이다. 풍수라는 것이 이론이 되려면 요즘 ‘수맥이론’처럼 보편성을 갖는 과학이 될 때뿐이다.
복록에 대한 집착은 단지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직업에 대한 귀천의식이 여전히 자리 잡게 되고, 따라서 지위지향의 성향이 팽배함으로 인해 사회에 여러 가지 폐해가 빚어진다. 자신의 지금 서있는 자리는 임시일 뿐 늘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은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만 하고서 살아가니 얼마나 불행한가. 그러니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서 평생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드물게 되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모두 만족을 못하게 되며, 따라서 사회는 자연히 불만으로 팽배하게 된다. 그래서 길가다가 어깨만 부딪혀도 금방 시비가 되고, 누가 입바른 소리를 하면 혹 자기를 음해하는 말은 아닐까 하고 긴장하게 된다. 정당한 노력을 해서 지위에 대한 욕망을 달성하기 어렵게 되면 조상의 묘를 옮기는 소극적인 일에서 시작하여 투서나 고소 같은 모략으로 상대방을 흠집 내어 상대적 이익을 도모하는 일까지 못하는 짓이 없게 된다. 일상적인 대인관계에서 이해가 상충하는 일이 생겨도 당사자끼리 대화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나 지위를 이용하여 해결하려들거나 법정까지 가고야 만다. 고소고발 사건이 일본의 백이십배나 되는 희한한 상황도 바로 이런 메카니즘 때문이다. 그런 부대낌에 자주 시달리다보면 대인관계라는 것이 복록의 취득과 방어를 위한 것만 남게 되어 순수한 인간관계란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결국 남게 되는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란 혈육 뿐, 그것도 자신의 세력범위가 미치는 혈육뿐이니 우리 사회에서 재벌을 비롯한 모든 기구가 결국 족벌위주로 짜이게 되는 것은 이 메카니즘 탓이다.
이런 현상이 바로 관료화 현상이다. 그래서 초등학교시절부터 줄반장이라도 해야 학교 다닐 맛이 나게 되고, 어른이 되어서는 자율방범대원이란 신분증이라도 자동차에 붙이고 다녀야 비로소 안심을 하게 된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서의 수입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차지한 지위에 당연히 따라오게 되는 프리미엄으로서의 수입을 노리게 되기 때문에 공직자들은 관행이라는 이름하에 부정한 짓을 죄의식 없이 저지르게 된다. 이렇듯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록을 구하는 관습은 겉으로 표방하는 것과 속내의 욕심이 서로 다른 이중적인 가치관이 교묘하게 얽히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것은 한자문화권의 또 다른 특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