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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디아스포라 1

曺明和 2024. 3. 16. 07:21

조선족 공동체 사이트에 실린 글 하나 소개합니다. 맞춤법은 일부러 맞추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한국인은 이제 선진국이 되었다고 제법 자랑하는데, 조상의 失政 때문에 외지로 떠돌아야 했던 우리 동포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선족이민실록] 김정록 가족(길림성 돈화시)   김정록, 1908년생.   길림성 돈화시 흑석향 경독촌 거주

내 나이는 80이여도 태생은 중국태생이다. 우리 고향은 함경북도 정성군이라는 데구 나는 룡정 동해라는 데 있는 샘뚝마을에서 태여났다.

우리 집이 조선에서 건너오기는 부친이 6살 때 건너왔다. 부친이 지금 계시면 106살이니깐 딱 건너온 지 100년이 된다. 조선에서 건너온 건 생활이 하두 구차해서 할아버지할머니가 자식들을 데리구 왔다. 기차라는 게 없을 때 돼서 다 걸어서 들어왔다. 부친의 생전의 말에 의하면 그때 룡정 바닥엔 인가가 아홉 호 밖에 없었다. 그때는 통나무를 베서 무져놓구 태우면서 감자를 굽었(구웠)는데 감자가 너무 커서 익지 않아 따개(쪼개)서 구웠다. 그래 조금만 심어도 몇 마대 씩 거두군 했다. 그때 룡정 시가지 안에는(지금 말하면 시가지 안이다.) 저수리나무가 꽉 들어차서 하늘이 안보였댔다. 동해물에는 이면수가 버글버글했다. 발을 놓으면 하루 저녁에도 몇 마대 씩 건질 때가 있었다.

내가 셈이 들었을 땐 그 동네(동네라야 10호 푼히 되였다)에 학교라는 게 섰는데 난 그 문턱에두 못 가봤다.

우리 부친은 심한 위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벌지 못하는 데다 식솔이 또한 많았다. 큰아버지가 계셨는데 큰어머니가 세상 뜨자 쏘련에 돈벌이 간다구 가버렸다. 하여 기음철이 되면 할아버지할머니어머니가 풀올 뽑았다.

봄에는 눈이 녹기 전에 쌀이 떨어지군 했다. 집형편이 이렇다 보니 난 여섯 살부터 6년동안 지주 집에 가 머슴살이를 하면서 고생이란 고생을 다 겪었다. 그러다가 돈화 관지(官地)의 횡도하자(橫道河子)라는 데 사는 고모한테루 갔댔다. 그때 돈화를 오동성이라구두 했다. 지금 제1백화상점이 선 곳이 오동성의 동문이였는데 그곳에 집들이 좀 있고는 도처에 나무가 꽉 우거지고 온통 수렁판이였다. 고모한테로 가보니 거기는 두지에서 벼가 썩어나는 세상이였다. 그래서 고모 하구 이사오겠다고 하니 오라고 하였다.

한데 우리가 이사해온 그해가 바루 만주사변이 일어난 해였다. 명월구(明月海)에 오니깐 일본놈들이 마대에 흙을 넣어 포대를 쌓아 놓고 있었다. 그래 겁이 나서 아버지하구 일본놈들이 들어왔는데 계속 가겠는가 물어보니 아버지가 나가도 죽고 들어가도 죽는데 가자구 하였다. 하발령(哈尔巴岭)까지 오니 일본 군대를 피해 달아나는 중국 군대들이 길을 꽉 메우고 있었다. 관지(官地)에 도착하니 그곳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본 놈들을 피해 달아나는 중국 군대가 우글우글했다. 이런 란시판이라 농사두 변변히 짓지 못했다. 그래서 또 돈화로 옮겨갔다.

그땐 그곳에 조선민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조선민회에서 집을 주선해주었다. 그리고 식솔이 많은 집은 1등 밀가루를 두 마대 씩 준 외 또 집집이 도끼 하나에 긴 톱 하나씩 나누어주는 것이였다. 부락밖에 나가면 죽는다구 해서 그저 해종일 부락안에서 장작을 패는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일본놈들이 들어와서 집을 수리하는 일을 하라 해서 하루에 35전씩 받고 일했다. 그 일을 하다가 돈화서부터 하발령까지 철길을 놓는 일을 하였다. 하루에 85전씩 받았다. 그 일이 끝난 후 돈벌이가 없어서 대교(大桥)에 나가 벽돌을 굽는 일을 했고 후엔 또 횡도하자에 되돌아가 농사일을 몇 달 하였다. 그다음엔 탑라자(塔拉子)란데 가서 몇, 관지에 가서 몇, 이렇게 떠돌이로 살다가 광복을 맞았다.

내 여기 횡도하자에서 결혼했는데 구차하니깐 누가 딸을 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돈화 대마로(大马路)에 있는 처녀가 자청해서 결혼이란 걸 했다. 그래서 딸애 하나 아들놈 하나를 보았는데 그 아들놈은 글쎄 다섯 날 나던 해 내가 사흘 동안 밖에 나갔다 오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집사람하구 어디 갔는가구 물으니깐 죽어서 파묻었다구 하지 않겠는가. 기가 찬 일이였다. 그 다음에는 딸애가 죽구 그 후에는 처가 죽구 녀동생도 죽었다. 이렇게 일곱 달 사이에 넷이나 죽었다. 지금 보면 전염병이였다. 다 그 개도 먹지 않는 돈 때문이였다. 처가 앓을 때 병원에 가니 소수레가 있는가구 묻는 것이였다. 없다구 하니 그럼 못 봐준다 하는 것이였다. 소수레가 있으면 팔아서 돈이 생기니 하는 말이였다. 그때 의사라는 건 이랬다.

그때 고생은 막심해두 풍속은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슨 놈의 풍속인지 상사가 났는데 소와 돼지를 잡아 놓구 온 동네 사람들이 일 주일 동안 그 집에 가서 하루 세 끼를 먹었다. 혼례에두 후행이요 삼일이요 하고 있는 례법을 다 차렸다. 그저 구차한 사람은 너울을 못 쓸뿐이였다. 단오에는 뽈두 차구 추석엔 그네두 뛰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