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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어쩌다 聖人이 되었을까?

曺明和 2024. 1. 29. 04:52

공자는 애당초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고자 꿈꾸었던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소크라테스나 싯다르타처럼 사유를 통해 인간사 여러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고자 애썼던 사람도 아닙니다. ‘인권이란 것에 주목하거나, 인간을 질적으로 제고시키려는 교육에 열의를 보였던 사람도 아닙니다. 공자는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정치 지망생이었습니다. 바른 정치를 향한 그의 염원은 제자들과 공동체를 꾸리도록 만들었고, 그 공동체 안에서 행해진 수업은 공자의 꿈을 펼치는 데 이바지하였습니다. 스승이 죽은 뒤 제자들은 매체를 활용하여 스승의 유지를 확대하고자 했고, 그 결과 공자의 사상은 보존되어 마침내 제왕들까지 움직이게 되었으며, 그 결과 오늘날의 聖人이라는 위상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공자의 사상이나 정치관은 어떤 내용일까요?

인간사회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는 것은 우주가 하늘()과 땅()으로 나뉘는 것과 짝을 이룬다는 생각이 공자 정치관의 기초입니다. 그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상하로 안정된 상태를 치(), 그렇지 못한 상태를 란()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가신들이 주군을 능멸하는 당대의 정치상황을 란으로 규정하면서, 치의 상태로 돌리는 것이 자신이 받은 천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집권해야만 했습니다. 무슨 수로? 그의 방법론은 군주에게서 통치권을 위임받는 재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공자는 어린 시절 현명한 재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접했던 듯합니다. 통치는 세습 군주가 직접 하지 않고 현능(賢能)한 재상에게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 중국 정치사의 이상인데, 그 이상을 설계한 사람은 사실상 공자입니다. 공자의 구상은 그대로 유교체제에서 구현되는데, 그것을 요즘 말로 하자면 관료에 의한 전체주의적 왕조체제입니다.

공자는 주()왕조 초기의 문물제도가 가장 이상적인 통치방법론이라고 말합니다. 그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는 왜 미래를 향한 혁신을 외치지 않고 복고를 외쳤을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전략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는 복고를 목표로 삼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는 현재의 체제를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체제 부정이 치러야 할 정치적 댓가는 어느 시대에나 너무 큽니다. 그래서 그는 선왕들의 방법론(=先王之道)으로 돌아가자고 내세운 겁니다. 무너뜨리겠다는 것이 아니고 조상이 했던 대로 돌아가자고 하니까 권력자로서는 반동으로 규정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반대하되 충돌하지는 않으려는 전략적인 슬로건이었다고 봅니다. 또 하나의 전략은 섭정입니다. 그는 주왕조 초기의 문물제도는 왕을 대리하여 섭정했던 주공(周公)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공을 성인의 반열로 추켜세웁니다. 주공의 섭정 때문에 중화질서가 위대해졌다고 강조합니다. 공자는 재상의 섭정 때문에 훌륭해진 치적의 사례도 홍보합니다. 그래서 재상의 섭정이야말로 이상적인 통치방식이라는 암시를 줄곧 던집니다. 재상이 되어 섭정하려는 자신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공자는 주변 민족과의 차별성을 내세우면서 위대한 중화의 부흥을 호소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공자의 하이관(夏夷觀)입니다. 그 관념은 요즘도 여전합니다. 강택민 집권시기부터 등장하여 시진핑 집권 이후 빈번하게 반복되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구호가 바로 그것입니다.

공자의 활동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것은 자신의 통치 방법론을 실천할 정무 담당자를 기르고자 제자들을 모아서 가르쳤던 일입니다. 공자는 자신의 통치 방법론을 ()’으로 표방합니다. 의 축은 이라면서, 례와 악으로써 천하를 로 만들자고 말합니다. 공자가 강조한 례라는 것은 통치의 규범이지 오늘날의 예의나 매너와 같은 성격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종교국가의 의례와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유교는 례교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적합합니다. 문헌학자들의 견해로는, 서주 초기에 공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신분질서가 확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자료는 없다고 합니다. 공자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견해이지요. 주왕조 초기의 문물제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공자의 주장에도 딱히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문헌 자체가 희귀한 시대인데, 문헌 고증에 자신할 사람이 등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의 주장을 받아주는 군주나 실력자도 없었습니다. 구호는 비록 구질서 회복이지만 어디까지나 나에게 정권을 맡겨보라는 요구이거늘, 약육강식의 각축장이나 다름없던 춘추시대에 문치(文治)라는 공자의 방법론이 권력자들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다만 권력의 기반이 무력이 아닌 문덕(文德)이라야 한다는 공자의 생각은 중국 정치사와 문화사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비록 수백 년의 세월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공자는 결국 성공합니다. 바른 정치에 대한 공자의 신념과 열망은 한()이라는 통일제국이 들어선 다음 이루어지게 됩니다. ()로써 집권할 수는 있어도 무로써 통치할 수는 없다고 인식한 무제가 제국을 영속할 수 있는 통치이념으로 유가의 통치술을 채택하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후 공자의 위계는 점점 높아지다가, 마침내 당왕조 무렵이 되면 대성(大聖)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후 2천여 년 동안 유가사상은 줄곧 중국정치의 이념이 됩니다.

 

공자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미디어를 활용하여 정치 이슈를 장악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공자가 그만큼 인간의 감성을 잘 파악했다는 뜻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호소력을 가졌던 것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열망하는 부귀의 본질은 무엇인지, 옳고() 그름(私利)의 기준은 무엇인지, 정치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저항 없도록 을 부리는 기술은 무엇인지, 실천이 없는 말은 왜 위험한지, 등등 그 시대 정치 이슈에 대해 공자는 자주 발언하고 실천하며 전파했습니다. 특히 현자를 재상으로 삼은 결과 부국강병을 이룩했다는 역사적 사례를 많이 홍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당한 권력이나 공포와 맞선 적은 없습니다. 권력의 속성에 대해 성찰한 적도 없습니다. 굶주림이나 전쟁과 같은 인민의 고통에 대해 주의한 적도 없습니다. 세련된 권력, 품위 있는 권력만을 지향했습니다. 인민의 고통 따위는 자신이 집권하기만 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한자문화권에서 권위를 확보하려면 문헌이나 인장을 확보하는 일이 필수입니다. 유가가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백가의 원조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기는 했지만, ···춘추등 국가적인 고전들을 자가의 경전으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그 문헌들은 공자 이전부터 주왕조의 국가 경영에 필요한 교재였는데, 공자는 그것들을 자가의 교재로 장악함으로써 입지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논어라는 종조의 어록을 갖춘 점도 큰 원인입니다.

 

공자는 스스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그는 스스로에 대해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끼니를 잊을 정도로 발분하기도 하지만, 시름일랑 음악으로써 잊고, 늙음이 닥친다는 사실에는 괘념조차 안 한다)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 말은 행복을 위한 조건을 능동적으로 마련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근심이 닥치기 전에 대비하자는 말도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일에는 무심하자는 권유입니다. 그런 권유는, 얻어맞고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이긴 것이 된다는 아큐(Q)의 정신적 승리법과 같은 처방이 나오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 정신적인 상처마저 입지는 말자는 위로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처방을 즐김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상이던 환경에서 살아야만 하는 피지배층으로서 그 외에 다른 처방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전체주의 왕조 체제가 지속되던 역사에서 형성된 반사적 대응일지도 모릅니다. 중국 문화의 많은 부분은 바로 그러한 토양에서 형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