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文’이라는 글자는 공자와 유학을 상징하는 브랜드처럼 사용되는 문자입니다. 모양이 단순할 뿐 아니라, 공자가 숭상했던 최고의 가치가 文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君子·仁·義·禮·知 등의 덕목을 강조했는데, 그 덕목들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그는 文이라는 한 글자에 담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추구하고 또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文에 斯라는 관사를 붙여 ‘사문(斯文)’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文이라는 글자는 문자(文字), 문화(文化), 문명(文明) 등 휴매니티 전반을 상징하는 캐릭터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공자의 평생 테마는 오직 정치뿐이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공자에게 文은 일차적으로 ‘지속 가능한 비폭력적 통치권력’이었습니다. ‘崇文賤武’(숭문천무:文을 숭상하고 武를 천시함)라는 유교체제의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文은 武(무)의 상대어로서 비물리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물리력을 배제한 통치를 하겠다는 말은 이상세계를 구현하겠다는 말처럼 매력적으로 들렸을 겁니다. 그러나 지배 권력이라는 점에서 文은 武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공자는 그 힘을 文力이라 부르지는 않고 文德이라고 불렀습니다. 力은 물리적 힘을 나타내는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武人들도 武力이라 부르지 않고 武德이라 부르는 경향도 나타나게 됩니다. 아무튼 文은 군주의 통치행위를 상징하는 글자입니다. 따라서 모든 文은 군주의 것이지 개인의 것일 수 없습니다. 함부로 文을 놀리는 짓은 군주의 권위와 통치를 방해하는 짓으로 간주되어 엄히 처단됩니다. 文(글)을 자기 맘대로 쓰는 것으로 알았다가 죽임을 당하는 필화(筆禍)가 중국사에 많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름이야 어쨌든 유교체제의 군주들은 모두 공자의 가치관을 따라서 숭문천무를 통치 방법론으로 표방하게 됩니다. ‘文德을 닦아서 백성이 모여들게 한다’는 것이 정치의 이상이었습니다. 비록 무력으로써 정권을 잡은 사람일지라도 문치(文治)라는 유교체제의 가치, 아니 명분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군주뿐 아니라 사대부들도 죽은 뒤 시호를 文으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됩니다. 文은 도대체 어떤 가치, 아니 어떤 명분이길래 그토록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을까요?
‘文’이라는 글자는 본디 ‘무늬’라는 뜻입니다. 동사(動詞)로는 ‘꾸미다’라는 뜻이 됩니다. 무늬는 기본적으로 아름답게 꾸민 것이기 때문에, ‘꾸미다’라는 말이 부정적인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공자 시대에는 흠을 가린다는 뜻으로 자주 쓰인 듯합니다. 문식(文飾)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꾸밈’이란 것을 생각하면, 꾸미지 않은 ‘바탕’도 당연히 떠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質이라고 불렀는데, 유가에서는 文과 質을 가지고 꽤 추상적인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文과 質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는 논쟁이 그것인데, 공자는 文이 두드러지는 것은 史, 質이 두드러지는 것을 野라고 표현하면서, 文質彬彬(문과 질은 서로 적절하게 조화되어야 한다)이라야 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후 文과 質은 중국의 미학, 문학, 철학 등 여러 관념체계에서 중요한 상징어로 사용됩니다.
文은 ‘문자’라는 뜻을 갖게 되는데, 중국의 문자는 애당초 이미지로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미지로서 만든 글자를 ‘文’, 거기서 파생되는 예컨대 音과 形을 합한 글자를 ‘字’라고 불렀습니다. ‘문자’라는 낱말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논어』에서 文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①지배층 소양으로서 詩를 비롯한 글이나 문헌(1·06, 3·09, 6·27, 7·25, 9·11, 11·03, 12·15, 12·24, 15·26).
②무늬·수식·꾸밈(14·12, 19·08). 質(꾸미지 않은 바탕)과 상응하여 사용되기도 함(6·18, 12·08).
③문화(文華), 문물제도. 이 경우 文章이라고도 표현함(3·14, 5·12, 8·19, 9·05).
④이상의 의미를 포괄하는 武의 반대개념(16·01), 그리고 그 뜻을 담은 시호(諡號)(14·18).
공자가 살던 무렵 주(周)왕조의 왕은 제후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만한 힘을 잃었습니다. 각 제후국 또한 대부분 무력을 가진 자들이 정권을 담당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공자는 그런 상황을 란(亂)이라고 규정하면서, 천하를 치(治)의 상태로 돌리는 것이 자신이 하늘로부터 받은 명령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런 태도는 현실 권력을 부정하는 태도이지만, 기성 질서를 회복하자는 명분이기 때문에 딱히 허물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것은 공자의 테크닉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오늘날 접할 수 있는 공자의 언어들은 모두 공자가 죽은 뒤에 만들어지는 문헌에 들어 있는 것이므로, 그가 생전에 어떻게 주장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공자는 옛 질서를 회복하는 방법론을 ‘무(武)’의 수단이 아닌 ‘문(文)’의 수단이라고 피력했습니다. 文의 축은 禮와 樂이라면서, 례와 악으로써 천하를 治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시』 『서』와 같은 문헌에 대한 소양을 쌓고, 례와 악을 익히며, 궁극적으로는 仁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군자라고 불렀고, 그런 군자가 정무를 담당해야 치(治)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론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공(周公)이 만들었던 문물제도이고, 그 방법론으로 돌아가야만 인간세계는 질서를 이룰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당시 문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특수한 소수뿐이었기 때문에, 주공 시대의 문물제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그의 주장에 딱히 반박할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자는 집권해야만 했습니다. 가진 군사력이 없었기 때문에도 무력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만, 그는 자신의 구상이 군주에게 채택되어 재상직이 맡겨지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의 구상이 어필할 수 있도록 미디어와 슬로건을 다듬었습니다. 공자의 그러한 꿈은 이후 그대로 모든 유자들의 꿈이 됩니다. 공자는 자신의 통치방법론을 문치의 방법론이라고 설명했고, 그 방법론을 실천할 정무 담당자를 기르고자 제자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실천’을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사에서 武가 아닌 수단으로 집권에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결국 꿈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후 등장하는 제자백가라 불리는 여러 이론가 겸 실천가들은 사실상 공자의 활동을 모방한 사람들입니다. 공자의 실천이 비록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시대 환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할지라도, ‘백화제방(百花齊放:온갖 꽃이 일제히 피다)’이라는 문화현상의 단초만큼은 분명 공자에게 있습니다. 공자와 유가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고전들은 제대로 전수되었을지, 한문이라는 문장체계나 수사법은 발전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공자의 활동은 중국의 지력(知力)을 확대시켰습니다. 공자에게 선뜻 통치권을 맡긴 군주는 없었지만, 공자는 충분히 유명해졌고, 사후에는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공자는 통치 수단으로서 文을 중시했을 뿐, 文을 최우선의 가치로 내세우지는 않았습니다. ‘글 배우기’는 사회적 소통 능력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합니다(行有餘力 則以學文). 그런데도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유자들은 文을 모든 가치보다 앞서는 가치로 가르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숭문(崇文)이라는 정책이 굳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문인’이라는 이름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이름은 아니고 정치권력의 인정, 그러니까 과거(科擧)와 같은 장치를 통해야만 얻을 수 있는 이름이 됩니다. 정치권력과 무관한 문인은 존재할 수 없었으니, ‘문인’은 ‘지배층’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립니다. 은일(隱逸)로 불리는 문인들이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은일은 기본적으로 권력층에 끼려다가 실패했거나 권력층에서 밀려난 부류이지 능동적으로 권력을 외면한 부류는 아닙니다.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권력층으로 들어가기 위한 명분을 쌓는 데 유리한 처신으로서 택하는 것이 은일이지, 차안(此岸)과 절연하고 피안(彼岸)으로 가고자 택하는 길은 아닙니다. 오로지 피안에 닿기만을 추구한다는 불교 승려조차 피안보다는 차안과 더 친연을 맺었던 것이 중국의 문화적 문법이었습니다. 그래서 文(꾸밈)이라는 통치방법론은 실제에서는 본질을 감추거나 변명하는 文(꾸밈)으로 나타나기 일쑤입니다. 이천 년 유교체제 역사에서 文을 숭상한다는 것이 실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났는지를 성찰하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통치라는 행위는 결국 힘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힘이라는 것은 겨루지 않을 수 없는 수단입니다. 중국사에서 武가 아닌 文의 수단으로 힘을 겨루는 통치는, 대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거나(不擇手段) 어떤 댓가도 감수하는(不惜代價)’ 양상으로 나타나기 일쑤입니다. 직접적이고 떳떳하게 겨루거나 다루지 않고 음험하고 이중적인 태도로써 상대를 무너뜨리고자 애쓰기 일쑤입니다. 심한 경우, 지고도 이겼다고 말합니다. 중국에서 정신적 승리법이라고 하는 이른바 아큐(阿Q)의 모델이 만들어지는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武의 수단으로 겨루게 되면 그런 양상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승부가 분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졌으면서도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통치행위는 물론, 인간사 모두가 겨룸의 연속인데, 겨룸의 마당에서 어떤 수단이 더 떳떳하고 더 아름다운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겁니다. 물리적으로 무기를 사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투명하고도 당당한 통치수단이나 겨룸에서는 ‘武’的인 떳떳함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文을 숭상한다는 유교체제 문화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그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