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
孝는 忠과 더불어 유교체제를 받치는 두 기둥 역할을 해온 덕목입니다.
孝라는 글자의 뜻은 ‘마음 다해 부모를 모시고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가족윤리입니다. 유교체제 왕조를 떠받치는 기둥이 가족윤리라는 것은 유교체제가 씨족사회 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체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孝에 대한 공자의 생각부터 살펴보기로 합시다. 『논어』에서 孝는 仁이나 義보다는 구체적으로 설명되는 편입니다. 그것은 孝를 관념적인 덕목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일러주어야 하는 행동양식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논어』에서 孝는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①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부모가 병환이 날까 걱정하는 마음(2·06)
②공경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일(2·07)
③힘든 일을 대신하거나 음식을 먼저 잡숫게 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공경하는 마음이 얼굴빛으로까지 나타나야(2·08)
④부모님 하시던 방식을 바꾸지 않는 것(1·11, 4·18, 4·19, 4·20, 4·21, 19·18)
이 밖에도 공자는 구체적인 사례를 더 강조합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적어도 삼년 동안은 아버지 하시던 방식을 고치지 말라고 합니다. 근대에 들어 유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말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어리석은 아버지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효란 말인가?” “어리석은 군주를 모시는 것이 충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런 비판은 반유교적이고 반전통적인 생각에 기초한 비판입니다. 유교에서 전제되는 것은 군주와 아버지의 완전함입니다. 군주와 아버지에게 비판받을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불충이요 불효입니다. 공자는 언제나 완전한 것을 학습하라고 했지 의문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삼년 동안 아버지 하시던 방식을 고치지 말라는 것은 孝의 취지를 설명한 말이기도 하지만, 젊은이의 의욕이 가져올 수 있는 실패를 막으려는 잠언이기도 합니다. 효는 이처럼 기본적으로 씨족사회의 틀을 지키기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개인에 대한 도덕률이 아닙니다. 유교사회의 도덕률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씨족사회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씨족을 넘어 민족이라는 개념을 구현코자 했던 몽골 제국이 중국을 지배하는 시기가 있었지만, 몽골 제국이 물러나자 이내 씨족사회의 틀로 돌아갔습니다.
공자는 부모를 부양하는 것만 孝가 아니라면서, 敬도 강조합니다. 공경하는 표정이나 태도가 드러나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子夏問孝 子曰 色難 有事弟子服其勞 有酒食先生饌 曾是以爲孝乎”(자하가 효의 요체에 대해 여쭙자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효행은 얼굴빛으로까지 드러나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 힘든 일 있으면 아랫사람이 수고하고 먹을 것 있으면 윗사람 잡숫도록 하는 것, 그런 것을 효라고 하겠느냐)(2·08)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기쁘게 만드는 것은 확실히 자식의 낯빛입니다. 공자의 말은 이처럼 인간사의 핵심을 짚기 때문에 힘을 지닙니다. 孝를 말하면서 ‘자식’과 ‘부모’ 대신 ‘弟子’와 ‘先生’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은 孝가 대가족 내부의 윤리임을, 씨족사회의 윤리임을 입증한다 할 것입니다.
공자는 이런 말도 합니다. “事父母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부모님 모시면서, 몇 차례 간해도 부모님이 그 간언을 안 들으실 것 같으면, 그럴지라도 더욱 공경하면서 부모님 뜻을 어기지 않아야 해. 아무리 힘들어도 원망하지 말고)(4·18) H.G.크릴은 이 발언을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관념과 도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관념이 충돌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서구적 관점의 오해입니다. 공자의 이 발언은 부자 사이 정서적 결합에서 지장이 될 만한 자식의 행동을 경계시키는 내용입니다. 부모의 처신에 잘못이 있더라도 복종해야 한다는 충고입니다. 부자간 정서적 유대에 손상이 갈 수 있는 사례를 들면서, 그 위험을 막거나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공자의 이러한 심리는 가부장제적 씨족사회에서 내재화한 심리일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가 유교문화권에서는 어떻게 형성되어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변용될 것인지,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가치 아래 개인의 보편적 권리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온 현대 관념과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인지 등의 문제는 유교문화권의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효에 대한 공자의 설명들은 결국 ‘윗 혈연을 공경하라’는 내용입니다. 가장 오래된 문헌이라고 할 수 있는 『상서·주고(酒诰)』에도 “用孝養厥父母”(효로써 자기 부모를 봉양한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윗 혈연을 공경해야 하는 까닭은, 국가체제는 물론 천하 모든 관계망도 혈연관계의 확대일 뿐이므로, 혈연관계의 질서를 잘 유지하는 것이 천하질서를 바르게 유지하는 기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교체제에서는 혈연관계의 질서를 매끄럽게 유지하기 위한 장치를 제도화하는데, 종법제도가 그것입니다.
인간세계는 하늘세계와 마찬가지로 질서가 잡혀야 한다, 인간세계 질서의 기본은 인간끼리의 유대이다, 유대의 수단은 계약이나 법률이나 이성 따위가 아니라 감성적 친밀이다, 감성적 친밀의 굵기는 혈연적 거리와 비례한다, 이런 생각이 공자사상의 기초입니다. 공자가 죽은 뒤 한참 뒤에 만들어지는 『예기』의 「중용」편에서는 그 생각을 이렇게 확장시킵니다. “효라는 것은 남의 뜻을 잘 이어주고, 남의 일을 잘 이어주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섬기고, 없는 사람을 있는 사람처럼 섬기는 것이 효의 궁극이다.”(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孝之至也). 실재하는 분들과의 관계망은 물론 돌아가신 분들과의 관계망까지도 존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역시 그 무렵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효경』에서는 이렇게도 설명합니다. “효의 시작은 부모를 모시는 것이지만, 중간은 군주를 섬기는 것이고, 마지막은 자신이 입신하는 것”(孝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
이런 설명들을 보면, 孝에 대한 강조가 인간의 성정을 관찰하거나 탐구한 결과에 바탕한 결론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천하의 질서, 그러니까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위해 가족관계의 질서를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효를 강조한 것입니다. 효행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공자의 말도 바로 그런 생각이고(2·21), 최초로 유교체제 왕조를 확립한 漢왕조에서 효를 치밀하게 강조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맹자같은 사람은 혈손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초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강조하기도 합니다. “不孝有三 無後爲大 舜不告而娶 爲無後也 君子以爲猶告也”(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후손 없는 것이 가장 크다. 순임금이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여자를 취했던 것은 후손이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군자는 그래서 순임금의 그 일을 부모에게 알린 것이나 다름없게 여긴다)(『맹자·이루상』) 이렇게 정리된 孝는 한무제 이후 군신관계의 윤리인 忠과 더불어 유교체제 왕조의 기본규범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은 군주에게 불충하는 사람과 마찬가지의 죄를 짓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한편 불교가 들어온 뒤에는, 부모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이 효라는 생각이 강조됩니다. 그래서 신하도 군주에게 일방적으로 忠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이미 내려준 恩을 갚고자 忠하는 것이 옳다는(義) 임협(任俠)적인 생각이 일어납니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라는 불교경전이 유교체제 왕조에서 소중하게 여겨졌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에 대한 孝가 군주에 대한 忠과 충돌하는 경우 무엇을 우선하는 것이 옳은가에 관한 문제가 유교체제 왕조에서는 심각한 주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맹자 이후로는 孝를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이 대체로 주류였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국가 권력을 우선하도록 강요하는 시대도 많았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불충을 고발하는 일을 공개적으로 칭송하는 시절도 많았습니다.
공자는 孝와 더불어 弟도 강조했습니다. 弟는 孝를 확대한 관념으로서, 혈연을 따지기 어려운 관계에서조차 나이 적은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해야 한다는 관념입니다. 공자의 “弟子入則孝出則弟.”(배우는 사람은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집밖에서는 공손해야 한다)(1·06)라는 발언이나, “宗族稱孝焉 鄕黨稱弟焉.”(종족 안에서는 효성스럽다는 말을 듣고, 공동체 안에서는 윗사람 공경한다는 말을 들어야지)(13·20)라는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弟’는 ‘아우’의 뜻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에 그 문장에서 弟를 ‘형제간의 우애’라고 새기는 망문생훈(望文生訓:글자만 보고 뜻을 만들어냄)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오류를 막기 위해 ‘悌’라는 글자로 바꾸기도 합니다.
정치에 대한 발언은 많이 하면서도 왜 현실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느냐는 조롱에 공자는 이렇게 응대한 적이 있습니다. “書云 孝乎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상서』에, 효도해야 할 사람인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면 정치에까지 연장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직위에 앉는 것만을 정치하는 것이겠소)(2·21) 공자의 대꾸가 약간 억지스럽게 들리기는 하지만, 정치란 것이 효제(孝弟)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생각 자체는 공자의 정치관 그대로입니다. 공자의 일관된 생각이자 유가 정치철학의 기초입니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던 꿈을 단념한 뒤에 있었던 대화인지는 모르나, 신분은 낮으면서도 정치에 대한 발언을 지속했던 공자로서는 이와 같은 조롱을 평생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고 국가는 그것의 확장이라는 소박한 인식은 결국 전체주의로 향하게 됩니다. 군주가 그런 인식을 갖게 되면 국가 구성원 전체에게 혈연적 유대와 다름없는 강한 유대를 요구하게 됩니다. 구성원들끼리 정서적으로 동조하기를 요구하고, 혈연적 유대를 다질 수 있는 행동패턴들을 익히도록 요구합니다. 부자·형제·부부·군신 관계는 물론 벗끼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유대 강화를 위한 행동패턴들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강조되는 덕목들이 바로 仁·義·禮·智·孝·悌·忠·信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 덕목들은 국가 통합을 위한 실천 지침들이지 개인 차원의 철학적 덕목들은 아닙니다. 유가사상은 이렇듯 정서적 유대를 기초로 해서 사회 통합을 추구하려는 사상이었고, 정서적 유대만으로는 통일왕조를 경영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법과 형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법가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씨족사회가 해체된 지금, 우리는 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효에 관한 유가의 행동지침을 부자관계가 아닌 일반적인 인간관계로 대입해봅시다. 가까운 사람이 나의 의견을 따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갑자기 먼 곳으로 떠나게 될 경우 가까운 사람에게 어떻게 말해두고 가는 것이 좋은지, 가까운 사람이 하던 일을 내가 잇게 될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가까운 사람의 나이나 생일을 기억하는 일은 관계 유지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등으로 말입니다.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을 자식의 부모에 대한 일방적인 정서로만 제한할 필요가 있을까요? 대등한 상호관계로 확대해도 되지 않을까요? 가부장제적 씨족사회에서 혈연을 기초로 한 윤리였던 효를 ‘약자에 대한 배려’나 ‘노년층의 경험과 지식을 청년층이 존경하며 전수받는 지혜’ 등으로 보편화할 수는 없을까요? 가족관계를 상하관계의 질서보다는 상호관계로 받아들이면 안 될까요?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구호 아래 전통문화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오늘날 여러 방면에서 일고 있지만, 혹시 지배와 피지배가 분명했던 봉건사회의 규범조차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런 생각이 가족폐지론의 연장으로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성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정서적 안정을 줄 수 있는 장치로는 가족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孝와 忠의 이러한 본질을 이해한다면 뚜웨이밍(杜維明,1940~) 등 이른바 현대 신유학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유교 인문주의’라는 이름으로써 공자의 사상을 인문주의라고 설명하는 것은 왜곡이 아닐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조상과 부모를 섬기고 주변의 노인을 연민하는 감정은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태도와는 당연히 구분됩니다. 상위 혈족을 공경하고 봉양해야 한다는 생각을 여전히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거나, 효를 부모가 자식에게서 보상받아야 할 권리처럼 인식하면 현대사회에서 많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정부정책에 따라 한 자녀만을 가졌다가 사고로 자식을 잃게 된 부모들이 2015년 5월 북경시제1중급인민법원에 집단소송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2016년 1월 26일자 《아사히신문》 기사〉. 국가가 둘째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노후에 자식에게서 봉양 받을 이익을 잃었으니, 이는 국가의 공공이익 때문에 개인의 권익이 상실된 것이라서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사건은 중국인이 노후에 자녀에게서 부양받는 것을 권리로 여기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봅니다. 유교국가에서 효는 결코 정서적 유대를 위한 관념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