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
이 글자는 원래 ‘마음을 다하는 태도’, ‘자기를 속이지 않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추상 영역이 아닌 감성 영역을 표현하는 말로서, 경(敬)과 비슷한 뜻이었습니다.
『논어』에 ‘충신(忠信)’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1·08, 5·27, 7·25, 9·25, 12·10, 15·06) 공자는 忠이라는 태도가 信(미덥다)이라는 태도와 짝한다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속이지 않는 태도와 남을 속이지 않는 태도를 아울러 강조하고자 忠과 信을 아울러 언급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스승님의 방법론은 충서 뿐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4·15)라는 문장에서, 일반적으로 忠은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가리키고 恕는 남에게 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설명됩니다. “使民敬忠以勸(인민이 군주를 공경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며 부지런하도록 만들다)”이라는 문장과 “孝慈則忠(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면 충성할 것입니다)”이라는 문장에서 忠은 성심을 다해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는 태도를 말합니다(2·20). 그래서 주희는 “盡己之謂忠(자기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충)”이라고 하고, 정약용은 “中心事人謂之忠(속마음으로 남을 섬기는 것이 충)”이라고 설명합니다.
『논어』에서 이런 뜻으로 사용되던 忠은 어언간 군주에 대한 신하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고정됩니다. 물론 공자부터 “臣事君以忠(신하는 군주를 충으로써 섬긴다)”(3·19)이라고 말한 바 있고, 『효경』에도 “故以孝事君則忠 以敬事長則順(효의 태도로 군주를 섬기는 것이 忠이고 공경의 태도로 어른을 섬기는 것이 順) ~ 君子之事上也 進思盡忠 退思補過(군자가 윗사람을 섬길 때는 적극적으로는 忠을 다하고 소극적으로는 허물을 보완한다)”라는 문장이 있기 때문에 忠이 그런 뜻으로 고정되는 것을 왜곡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로자』제18장의 “大道廢有仁義 慧智出有大僞 六親不和有孝慈 國家昏亂有忠臣(대도가 무너지면 인의가 나오고, 지혜가 뛰어나면 큰 작위가 나오며, 육친이 불화하면 효자가 나오고, 국가가 혼란하면 충신이 나오는 법)”이라는 대목을 읽자면, 전국시대 무렵 관직을 세습시키는 대신 현자를 우대하고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는 분위기로 바뀌는 과정에서 忠이 군신관계를 규정하는 덕목으로 굳어지지 않았을까 합니다.
어쨌든 한대에 들어 유교체제가 확립되면서, 군주에 대한 忠은 부모에 대한 孝와 더불어 국가 경영의 주축으로 확립됩니다. 충과 효를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를 하도록 국가권력이 유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孝라는 이름으로 할고(割股: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부모의 약으로 사용함)라는 반인간적인 짓을 저지른 기록은 수도 없이 많을 뿐 아니라, 통계가 남아 있는 명·청대만 하더라도 효와 절개 때문에 자살한 여인이 6만 명 정도나 됩니다. 치밀한 유교체제 국가였던 천황제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5천여 명의 가미카제 특공대 청년 비행사들이 忠이라는 이름으로 죽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도 당과 국가에 대한 인민의 충성은 강조되고, 대한민국에서도 은연중 국가에 대한 충성이 강요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남송 이후 리학에서는 공자처럼 忠恕를 강조하지 않고 主敬行恕를 강조하게 됩니다. 忠이 원래 敬과 비슷한 뜻이었으므로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리학은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므로, 군주에 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忠을 자기 자신을 향한 태도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서 글자를 바꾸지 않았을까 합니다. 조선의 이황도 『성학십도』에서 “心者一身之主宰 而敬又一心之主宰也(心은 一身의 주재자이고, 敬은 一心의 주재자이다)라고 설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