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
공자는 제자들에게 仁을 완성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동시에 仁을 완성하자면 禮와 樂(악)이라는 두 가지 수단이 필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례와 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공자는 이렇듯 기준만 제시하는 사람이었지 기준의 내용을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내용을 파악하여 익히는 일은 온전히 배우는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후대 학자들의 몫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禮와 樂은 무엇이며, 어떻게 仁을 완성하는 수단이 될까요?
樂은 당연히 음악이겠지요. 그런데 음악이란 것은 문헌으로 남길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글로써 樂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한계가 빤할 뿐 아니라 맛도 없습니다. 그래서 樂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禮에 대해서만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禮’ 자의 갑골자는 ‘王’ 자의 오른쪽에 음식을 담은 그릇을 표시하는 ‘豊’ 자를 붙인 모습입니다. 그 이미지는 음식을 바치면서 제사 올리는 모습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나의 조상인 天(=先王)은 후손인 나와 너희들 모두의 삶을 주재한다고 말하면서, 天에게 음식을 바치고 공대하면서 천의 명령을 받들어야 모두의 안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이 곧 최고 권력자인 군주입니다. 그러니까 ‘禮’ 자의 원형은 군주가 天에게 음식을 바치면서 공대하는 의식인 제사를 올리는 모습을 상징하는 문자였을 것입니다. 나중에 ‘王’ 대신 ‘示’로 바뀌면서 지금의 ‘禮’ 자가 됩니다.
고대사회에서 정치권력의 토대는 제의(祭儀)를 주관하는 권한이었습니다. 제의(祭儀), 그러니까 禮를 장악하지 않고서는 군주의 권력은 지속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한 사정은 원시적인 제정일치 사회에서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한자문화권만의 사정도 아니었습니다. 브라만교 사회에서도, 고대 헬라에서도, 고대 이집트왕조에서도, 로마에서도, 중세 서구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류사에 등장하는 모든 종교 프레임은 정치권력이 만든 것이라고 봅니다. 군주의 물리력이 미치는 범주는 제한적이고 일시적이지만 종교 프레임의 힘이 미치는 범주는 제한이 없을 뿐 아니라 효과도 길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정치권력을 잡은 군주로서는 자신의 권력을 영속할 수 있는 수단으로 종교 프레임을 구상하게 됩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공동체를 장악하려면 반드시 종교 프레임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禮의 표면은 종교 프레임이지만 내면은 정치권력입니다. 禮를 강조하는 사람은 곧 자신의 권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禮의 본질입니다.
군주의 권력을 영속하는 장치인 天에 대한 제사는 당연히 엄숙하고 무겁게 치러지게 됩니다. 의식(儀式)의 절차는 최대한 세밀하게 다루게 됩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강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제사를 상징하던 ‘禮’ 자는 어느덧 ‘의식 절차’라는 뜻이 더 강조됩니다. 나아가 춘추시대 무렵에는 의식절차를 따르는 ‘규범’이라는 추상적 의미로 확장하는 듯합니다. ‘天을 섬기는 의식절차’라는 뜻에서 ‘규범’이라는 뜻으로 확장된 것이지요. 『시경』과 『서경』에도 ‘禮’ 자가 규범의 뜻으로 사용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禮의 본질이 仁과 義라고 공자가 강조한 뒤 ‘禮’ 자는 규범이라는 뜻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禮라는 규범은 어떤 규범일까요?
애당초는 군주가 天에게 올리는 제사의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규범이었겠지요. 군주가 올리는 제천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면 곧 지배계층입니다. 군주가 올리는 제천의식에 참석하는 지배계층은 누구보다도 제천의식의 규범에 밝아야 했을 겁니다. 그 말은 곧 제천의식이 지배계층의 사회화 훈련장 기능을 했다는 뜻입니다. 禮는 총체적으로 지배계급으로서의 행동규범이었던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예의바른 사람’이라고 하면 사회화 훈련이 잘 된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좌전』(소공25년조)에는, “례는 상하의 기강이자 천지의 경위이며 백성이 살아가는 바이다. 그래서 선왕께서 숭상하셨다(禮上下之紀 天地之經緯也 民之所以生也 是以先王尙之).”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禮를 의식(儀式)과는 차별화된 추상적 관념으로 규정하는 내용입니다.
『례기』에는 “례로써 나라를 바로잡는 것은 저울로써 무게를, 먹줄로써 곡직을, 자와 콤파스로써 네모와 동그라미를 바로잡는 것과 같다(禮之於正國也 猶衡之於輕重也 繩墨之於曲直也 規矩之於方圜也).”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역시 례를 추상적 관념이라고 규정하는데, 나라를 바로잡는 규범이라고 말합니다. 『좌전』이나 『례기』는 공자 뒤에 성립되는 책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공자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 분명합니다.
禮라는 규범은 원래 이처럼 지배층에게만 적용되는 수단이었습니다. 피지배층에게는 례가 아닌 별도의 규범인 형(刑)을 적용합니다. 『례기』에서는 “례는 아래로 서민들에게까지 적용되지는 않고, 형은 위로 대부에게까지 적용되지는 않는다(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라고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고대 중국에서 刑은 法과 같은 뜻입니다.
刑이나 法을 지배계층에게 적용하지 않는 까닭은 지배계층은 군주의 대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혈통으로 따지더라도 지배층은 원래 창업주의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역죄가 아닌 한 지배계층에게는 형을 적용하지 않고 禮를 적용하여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禮는 지배층 내부의 상호 신뢰와 결속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입니다. 다만 상대에게 례를 갖춘다는 것이 상대를 신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는 례를 차리면서도 속으로는 서로 원망할 수 있습니다.
유가의 禮는 이처럼 오늘날의 예의나 공중도덕과는 차원이 다른 종교국가의 의식과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왕조를 유교체제로 바꾼 한무제는 지배계층의 규범인 례를 개념적으로 추상화하고 기능적으로 세분화하여 길례(吉禮)·흉례(凶禮)·빈례(賓禮)·군례(軍禮)·가례(嘉禮)라는 다섯 가지로 정비합니다. 이후 례는 문화적 전장(典章)제도로서의 ‘의례(儀禮)’와 도덕적 심리의식으로서의 ‘공경(恭敬)’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면서 교화나 교육의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공자가 례에 관한 문헌을 지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좌전』에 의하자면 춘추시대에 례에 관한 전문적인 문헌은 있었던 듯합니다. 다만 『논어』에 ‘禮曰’이라는 표현이 없는 것을 보면 공자 당시에 책의 형태로 갖추지는 못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주요 텍스트는 『시경』과 『서경』이었지만 구체적이고 중점적으로 강조한 것은 禮였습니다.
공자와 관련된 기록물이면서 『논어』에는 편입되지 못한 것들 가운데 禮에 관한 것들은 나중에 『례기』·『주례』·『의례』라는 책으로 성립됩니다. 그래서 『의례』와 『례기』에는 『논어』와 비슷한 문장이 많을 뿐 아니라 『논어』처럼 공자와 제자들이 주고받은 문답 및 공자 직전(直傳)제자들의 어록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례기』는 전한의 대성(戴聖, 선제 무렵)이 편찬한 것이 확실하고, 『주례』는 전국시대나 한초(漢初)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禮’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①禮는 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니, 仁을 위하지 않는 禮는 소용없다(3·03, 3·08). ‘克己復禮’(자기를 누르고 례를 회복하는 것)가 仁이다(12·01).
②義라는 바탕이 없으면 禮는 소용없다(15·18).
③禮는 文(꾸밈)이기는 하지만 儉(검소함)이라는 가치를 우선해야 하고(3·04, 9·03, 11·01), 禮를 행하는 방법은 경(敬)과 공(恭)이 필수이다(3·26, 12·05).
④재산이 많다고 禮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1·15). 禮의 효용은 ‘和’라는 효과를 낸다(1·12).
⑤군주의 통치행위도 禮讓(예의와 겸양)을 우선해야 한다(2·03, 3·19, 4·13, 11·26). 禮讓은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화해야 한다(2·23, 3·09). 그렇지 않으면 형벌이 균형을 잃어 인민이 살 수 없게 된다(13·03).
⑥윗사람이 禮를 지키면 아랫사람도 도리를 다하게 될 뿐 아니라(13·04) 인민을 부리기도 쉬워진다(14·41). 禮樂은 천자를 정점으로 하여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16·02).
⑦지배계층인 군자는 ‘博學於文 約之以禮’(文을 넓게 배우고 례로써 자기단속을 함)해야 한다(6·27, 9·11). 禮를 아는 처신이 어떤 것인지 늘 점검해야 한다. 자신도 상대와의 대화를 통해 점검하고 깨달은 적이 있다고 토로한다(7·31).
⑧례는 인민의 삶에서 孝로 나타난다(2·05). 詩와 樂을 병행해야 한다(8·08, 16·05, 16·13, 17·21).
위 언급들을 종합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배층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면 인간 존재의 토대가 되는 육체적 감성의 맹목성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삶의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요구되는 제어를 위한 규범이 禮이다. 그러나 제어한다고 해서 육체적 감성을 아예 여의면 삶 자체가 공허하게 된다. 규범으로써 제어하되, 규범과 감각을 조화시키는 심미적 일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삶의 완성된 단계이다.” 그래서 공자는 악(樂)을 禮와 균형 있게 중시했다고 봅니다.
맹자를 거쳐 순자에 이르면 례의 개념은 보다 분명해집니다. 순자는 禮가 개체로서는 각자의 직분을 밝히는 수단이지만 궁극은 군체(群體)가 하나로 화(和)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한 정의는 禮가 궁극적으로 통치의 수단이라는 공자의 생각을 계승한 禮論입니다. 『순자』의 “禮者法之大分(禮는 법의 가장 큰 부분이다)”이라는 표현이나, “國無禮則不正 禮所以正國(禮가 없으면 나라가 바르지 못하게 된다. 禮는 나라를 바르게 만드는 소이이다)”이라는 표현을 보면 순자는 禮를 治의 수단으로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이는 공자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비자는 순자의 발언을 비판합니다. 통치에 중요한 것은 禮보다는 法이라고 주장합니다. 유가를 제외한 백가도 대부분 유가가 禮를 지나치게 중시한다고 공격합니다. 심지어 유자들은 禮를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禮의 형식은 儀(거동)로써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儀만을 존중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공격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한대(漢代)의 허신이 『설문해자』에서 禮를 ‘所以事神致福也(귀신을 섬겨서 복을 오게 하는 것)’이라고 퇴행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당대 유자들이 살아가는 실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남송대의 주희는 禮를 ‘天理之節文’(천지가 움직이는 원리를 절도 있게 표현한 형식)이라고 규정하면서 추상적인 관념을 다시 강조하게 됩니다.
禮는 밖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중요하기 때문에 禮를 강조하는 사람은 형식주의자로 간주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이 형식주의자는 아니라고 자주 설명해야 했습니다.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拜下 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9·03)(삼으로 짠 치포관이 례에 맞지만 요즘 사람들은 명주실로 짠다. 그건 검약한 방식이기 때문에, 나는 례에 맞지 않더라도 요즘 사람들 방식을 따라 명주실로 짠 치포관을 사용한다. 임금 뵐 때 당하에서 절하는 것이 례에 맞지만 요즘 사람들은 당상에서 절한다. 그건 교만한 방식이기 때문에, 비록 여러 사람들의 방식과는 어긋날지라도 나는 당하에서 절하기를 고집한다)라든가, “禮與其奢也 寧儉(례의 근본은 늘이기보다는 줄이기이다)”(3·04), “禮云禮云 玉帛云乎哉(례가 중요하다 례가 중요하다고들 말하는데, 그 말이 곧 옥이나 비단과 같은 예물이 중요하다는 말이겠느냐)”(17·11) 등의 언급은 그런 해명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남송 이후 리학자들은 공자의 그러한 ‘관념’보다도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12·01)과 같은 공자의 ‘말’을 더 중시한 나머지 극단적인 경건주의로 빠지는 경향이 분명 있었습니다.
유교체제의 禮를 복원하고자 하거나, 유교체제에서 통용되었던 禮의 정신이라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유교체제에서의 禮에 대한 관념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