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문학/한국어

너 말 다했어?

曺明和 2021. 7. 20. 17:22

<2006년 8월 24일 작성>

 

너 말 다했어? 

 

  다툴 때나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일상 대화에서 반드시 이 말부터 하게 하면 어떨까? 마치 무선통신에서 상대가 'over(내 말은 여기서 끝남)'라고 말한 다음에야 이쪽에서 발신 버튼을 누르고 말하듯이 말이다. 내뱉기가 거북하면 속으로라도. 

  

  웬 생뚱맞은 말이람? 

  우리네의 대화모습에서 상대의 말을 다 들은 다음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우스개로 해본 말이다. 양자 간의 대화에서 주고받는 랠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말 내뱉기로만 대화를 일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물며 다자간 대화나 회의는 어떻겠는가. 상대의 말을 다 들은 다음 자신의 말을 하려고 하면 한 마디도 못하고 끝나게 된다. 자신의 의사를 말하려면 다투듯이 나서야만 하고, 그렇게 하기가 싫으면 말수가 없는 사람으로 호가 난다. 우리네의 대화 모습은 왜 그럴까? 

 

  대화라는 낱말에 대한 한국인의 첫인상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우선 긴장이다. ‘대화 좀 하자’고 말하면 ‘나 너에게 할 말 있다’는 뜻이 되고, 이때의 할 말은 일방적인 전달이며, 따라서 상대는 긴장하게 된다. 

  다음으론 귀찮음이다. 용건만 말해. 말 안 해도 알아. 난 그 사람 눈빛만 보면 알 수 있어. 육감만으로도 상대의 의중을 잘 집어내는 것이 한국인의 특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결국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에게서는 정보만 필요할 뿐 너의 의견 따위는 필요 없다는 태도이다. 그건, 넌 생각 없는 사람이라는 단정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그런 사람과 대화하게 되면 나에게 그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얼굴에다 침을 뱉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한국인은 멘탈리티 자체가 대화라는 것에 적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다. 그 말은 곧 한국인의 대인관계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성적이며, 개인적 삶보다는 향우회 동문회 친목계와 같은 집단적 삶의 비중이 크다는 말과도 연결될 수 있다.  

 

  그런 분석들 외에도 한국인이 대화를 싫어하거나 못하는 이유는 많다. 그러나 아무리 많아도 귀착은 한 군데이다. 인간관계가 봉건적이기 때문이다. 대화란 상대와 내가 대등하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건만 한국사회는 봉건적 제도는 걷어냈어도 봉건적 관념은 그대로여서 대등한 인간관계의 설정에 익숙하지 않다. 높거나 낮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치면 상하를 결정하려는 갈등이 필수적이게 된다. 그래서 모든 만남은 수 싸움 또는 기 싸움 자체가 된다. 인간관계 자체가 서열 짓기가 되는 것이다. 이때 상하관계가 현저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비슷하다고 여기게 되면 그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의 본질이란 결국 우열을 가리는 다툼이 된다. 어떻게든 상대를 눌러야 한다. 누르는 그 자체로 맛이 있을 뿐 아니라 편안함도 편리함도 주어진다. 그러니 상대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곧 내가 수 싸움에서 밀린다는 뜻이 된다. 모든 인간관계가 이런 계급의식으로 이루어지니 평등한 대화란 참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어쩌면 서로를 대등하게 존중하는 우정이란 것도 진정 싹트기 어려운 환경이 아닌가 한다. 세월이 갈수록 상대의 흠만 찾아내기에 바빠지니 말이다.

 

  나이로든 지위로든 ‘말빨’로든 일단 접히게 된 사람의 입장에서 상대의 말은 설교로밖에 들리지 않게 된다. 그래서 관계 설정이 일단 이루어지면 안정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불안하게 된다. 차라리 몰랐던 사이가 더 낫다. 언제든지 뒤집으려는 반동에너지를 더욱 세차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인은 설교를 특히 싫어한다. 왜? 한국인은 유교전통 탓에 배움에 대해서라면 모두 일가견을 가졌다. 사람됨의 도리에 관한 책을 집집마다 몇 권씩은 쌓아두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나를 가르치려 들면 못 참는다. 남의 설교는 못 참으면서도 자신은 남에게 설교하고자 안달을 하니, 대화의 괴리는 그래서도 생긴다.    

  

  듣는, 아니 들어주는 훈련이 필요하다. 비록 상대가 나를 가르치려드는 자세로 말을 걸더라도, 수 싸움으로 기선을 잡고 들어오려 해도, 일단 끝까지 들어주는 자세 유지하기를 훈련해보자. 그건 바로 상대를 존중하는 훈련이다. 뉴스에서 들었던 얘기, 고전에 나온 얘기 등을 호들갑을 떨면서 늘어놓더라도,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설교(종교적 신념을 듣기란 또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하더라도, 일단 들어주는 훈련부터 해보자. 복을 받기 위해 참자거나 처세를 위해 참을 忍자를 여러 번 쓰는 연습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존중하는 배움과 훈련을 해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