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문화

道란 무엇인가?

曺明和 2021. 10. 1. 13:01

  는 동아시아 사상사와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글자입니다. 유가뿐 아니라 제자백가도 모두 를 말하였고, 를 좇아 살아야 한다는 도교(道敎)라는 종교교단도 만들어졌으며,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조차 붇다를 를 얻은 사람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의 여러 방면에서도 書道茶道니 하면서 곧잘 를 내세웠습니다. 이처럼 는 동아시아 문화사와 사상사에서 다양하고 중층적인 의미를 지닌 낱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유효한 방법론또는 벗어나서는 안 되는 방법론이라는 개념을 이라는 일반명사로써 은유하는 일은 세계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라는 글자는 은유를 넘어 깊은 의미가 담긴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곤 합니다. 중국 바깥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컨대 벤자민 슈워츠는 외적으로는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내적으로는 개인의 도덕적 삶을 포괄하는 객관적 규범으로서 인간과 영적 존재들을 한데 묶어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지나친 의미 부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도가(道家)를 일컬을 때도 그냥 도가라고 부르지 않고 신비주의적인 도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가 도가를 마치 오리엔트에서 유행했던 신비주의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무위(無爲)라든가 자연(自然)이라든가 하는 도가의 주제어들은 로고스적으로는 모순적인 이름이기 때문에 신비주의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무리는 아닐 듯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제어들은 인위적인 표준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유가의 방법론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인위를 반대하고자 내세웠던 구호로서 등장한 것입니다. 도가는 적어도 초기에는 공자와 같은 주도적인 인물이 나서서 제자집단을 이끌면서 뚜렷한 활동을 한 집단은 아니었습니다. 老子莊子는 글로써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정도의 활동을 했을 뿐 공자처럼 제자들을 이끌면서 정치적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아닙니다. 백가의 제자(諸子) 또한 모두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지 철학적 탐구를 하거나 신비주의적 수행을 목표로 집단을 거느렸던 사람들은 아닙니다. 백가를 리드했던 제자는 열국이 각축하는 춘추전국시대 환경에서 이것이야말로 가장 경쟁력 있는 부국강병책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갑골문에서 자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주대(周代)의 금문(金文)에서 보이는 가 결합된 모습의 이미지가 자의 원형으로 간주될 따름입니다. 공자 이전의 문헌에서 이라는 뜻에서 출발하여 인도하다’, ‘행동의 지침’, ‘방법이라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논어에서는 주로 방법론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天道’, ‘人道’, ‘君道’, ‘臣道’, ‘吾道라는 표현이 나오게 됩니다. 논어에 나오는 는 송유(宋儒)들이 생각하듯이 사물의 당연한 이치로서 모든 사람이 지니는 것과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도가에서 말하는 인간 중심의 규범이 아닙니다. 인간을 떠난 만물의 존재 원리로서의 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수식어 없이 그냥 라고만 부릅니다. 역경에서 형이상의 것을 ,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정리한 뒤로 유가에서든 일반에서든 는 추상적 관념의 이름으로 고정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9세기 말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되자 이고 라는 생각이 나오게 되었고, ()에서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 나오고 조선에서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이 나왔던 것입니다. 두 나라 사이에 용어를 다르게 사용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를 말한 것은 지배층이 되고자 하는 그들의 행동을 리드하거나 통제하려는 목적이었지 그들에게 피안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세상의 질서 즉, 군주를 중심으로 한 정치질서를 학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를 행하는 것이 곧 의(:옳음)라고 말합니다. 라는 두 관념은 모두 군주를 중심으로 한 질서라는 기초 위에서 형성되는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관념입니다. 주희는 사물의 당연한 이치로서 모든 사람이 다 지니는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에 대한 막연한 개념은 주희의 그런 규정과 비슷합니다.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관념 가운데에는 라는 것도 있습니다. 논어로자에는 나오지 않지만 묵자에서 쓰이기 시작하다가, 순자단계에서 를 행하는 것이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수()와 당()을 거치는 동안 천태종과 화엄종이 중국의 사상계를 풍미하면서 실재하는 본체라는 관념으로서 라는 것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후 보편적으로 실재하는 원리라는 관념을 가리키는 낱말이 됩니다. 주희는 인간 세상과 만물에 모두 실재하는 원리라는 개념으로서 를 강조하면서, ‘는 통합한 명칭, 는 낱낱의 명칭이라고 설명합니다. 道理라는 말은 그렇게 해서 유행하게 됩니다. 주희 이후 리학에서는 공부 자체를 도학(道學)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리학이 일어난 뒤로 유자들은 인간세계와 우주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원리로서 를 강조하게 됩니다. 인간사와 만유에 두루 실재하는 보편적인 원리는 바로 이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리학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통제하는 비물리적 수단으로는 천명(天命)’()’도 있습니다. 천명이나 덕은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것이지만 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는 어쩌면 천명이나 덕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배 권력이 지향하는 노선을 세련되게 은유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도는 곧 통치 방법론인데, 도를 실현하자면 정치권력을 장악해야만 했습니다. 벤자민 슈워츠가 만일 도라는 것이 어떤 사태의 전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도는 현금(現今)의 서양 사회적 담론 안에서는 시스템(system)과 흡사한 개념을 가지게 된다.”라고 말한 것은 그 점을 잘 인식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평생 권력을 쥐고자 애썼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를 행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던 것이지요. 다만 그는 표현만큼은 선왕들의 도(=先王之道)를 회복하자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곧 자신의 견해가 반동행위는 아니라는 표방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권력자들은 공자의 언행을 억누를 명분을 딱히 찾을 수 없었다고 봅니다. 그 점은 공자의 정치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왕지도를 가장 잘 안다는 공자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당시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며, 있다 한들 확인할 방법도 없었을 것입니다. 선왕지도란 것의 내용이 당시 문헌으로 남았을지조차 의문이거늘, 내가 선왕지도에 가장 밝다는 공자의 주장에 반박할 사람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법론, 先王之道)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도 당연히 생기게 됩니다. 선왕지도는 바로 이것이라고 공자가 말한 바는 없지만, 굳이 추리자면 례()를 꼽을 수 있습니다. 고대인은 천문의 규칙성을 관찰하게 되면서 인간의 움직임도 천문처럼 규칙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한데, 그런 규칙성이 바로 례입니다. 그러한 의 주축은 당연히 경건함입니다. 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공자의 말은 논어에서 확인됩니다. 라는 외적 권위와 이라는 내적 힘은 라는 조정장치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례는 통치의 규범이지 오늘날 예의나 매너와 같은 성격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유교는 례교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중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밝지 못한 서구 학자들은 공자가 왜 미래에 희망을 걸지 않고 과거를 기준으로 삼고자 했는지를 궁금해합니다. 그리스나 인도 등 대부분의 고대문명에서는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믿음 정도는 있지만 과거의 영화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은 없었다면서, 인류문명의 최고 가치가 과거에 이미 성취되었다는 신념이 왜 공자의 머리에 떠올랐을지 궁금해합니다. H.G.크릴은 주()왕조 초기에 이집트를 제외한 다른 고등문명권에서는 보기 힘든 긴 대내적 평온 상태가 있었다는 점을 듭니다. 벤자민 슈워츠는 경험에서 얻어진 좋은 기억이 같은 성스러운 문헌에서 발견된 생각들과 결합되어 전폭적인 이상화로 귀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다분히 서구적인 사유입니다. 공자가 과거를 표준으로 내세웠던 것은 기득권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집권을 노리는 기술적인 슬로건이었을 뿐이라고 봅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검증된 과거가 슬로건으로서는 더 설득력 있었던 것이지요.

동중서(董仲舒,176?~104BCE?)는 정치의 길이요 인의례악은 정치의 도구라고 규정하면서 유가사상을 치국의 이념으로 건의했던 것은, 그리고 무제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정착된 유교체제가 2천 년 남짓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자의 사상이 체제 옹호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안전한 과거를 지향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이처럼 도를 은유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주변화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을 유가의 경전에 포함시킨 이후, 그리고 천지의 어머니이자 세계의 본원이라는 이름으로 도를 선전하는 도가가 등장한 이후, 또한 리()라는 개념을 내세우면서 방법론으로서의 를 중시한 리학자들이 등장한 이후, 는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 굳어집니다. 다만 맹자는 도는 외적인 것이고 인성(人性)이 내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맹자의 뒤를 이은 법가에서는 도 아닌 에 의존하자고 말합니다. 그것은 법가만의 결론은 아닙니다. 이후 모든 왕조는 유교체제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법가적 체제로써 통치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 , 을 내세우면서도 을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방법에 의존하여 통치했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는 다음 네 가지로 적절하게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방법또는 올바른 방법’, 선왕이 만든 례악제도, 지배계층의 바른 도리, 경세지도(經世之道). 물론 樂道人之善”(16·05)처럼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道聽而塗說”(17·14)처럼 이라는 뜻의 일반명사로도 쓰이고, “忠告而善道之”(12·23)처럼 의 통자로도 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