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부론(先富論)과 공부론(共富論)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당이 집권한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중국을 방문하게 되면 중국의 실제는 도무지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명분과 실제가 영 딴판임을 알게 되지요. 또한 여러 가지 불합리한 경우에 부닥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중국인들은 “여기는 중국이니까”라는 말로써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그때야 우리는 비로소 중국공산당이 내세우는 ‘중국특색사회주의’라는 구호는 이런 모순을 합리화하는 말임을 깨닫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요즘 ‘공부’(共富, 공동부유)라는 말을 자주 꺼냅니다.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자고 하면 될 텐데, 왜 ‘공동부유’라고 강조할까요? 형식논리로 따지자면 그것은 중국의 부가 전체적으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빈부의 격차가 심한 사회임을 반증한다고 보면 되겠지요. 그러나 ‘빈부격차 해소’라고 말하지 않고 ‘공부’라고 말하는 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등소평이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내건 구호가 선부론(先富論)이었기 때문입니다.
선부론은 등소평(鄧小平,1904~1997) 이후 시행된 개혁개방 정책을 포장하는 슬로건이었습니다. 공산당의 정강 정책과는 어긋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슬로건이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중국의 경제력이 이처럼 커진 것은 개혁개방 정책 때문이라는 점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등소평은 바깥을 향해서는 ‘개혁개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안을 향해서는 ‘선부론’(先富論)이라는 구호로써 인민을 설득하면서 경제발전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선부’라는 말은 “부유해지는 것이 먼저!”라고 해석될 수 있는 구호입니다. 그런데 등소평이 그 슬로건을 내걸 때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개방정책을 펴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자면 동시에 골고루 부유하게 만드는 것보다 일부 지역부터 집중적으로 부유하게 만드는 정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달라는 설득이었습니다. 공산당의 정강 정책과는 어긋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피하기 때문에 그는 당원과 인민을 향해 설득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등소평은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라면서, 우선 궁극적으로는 ‘공부’이지만 우선 ‘선부’할 수밖에 없음을 설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등소평의 정책을 ‘선부론(先富論)’이라 부르지 않고 ‘선부공부론(先富共富論)’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등소평의 선부론과 비슷한 이론에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라는 것이 있는데, 컵을 피라미드처럼 쌓은 다음 위에서 물을 부으면 위쪽의 컵부터 채우면서 아래 컵들도 채워진다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조지 H.W.부시 대통령이 시행했다 실패하면서 비판받은 바 있고, 아무런 사회과학적 근거가 없는 허구 이론으로 증명된 바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루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4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정책이 가져온 모순에 대해 눈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부가 편중되면서 심각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라는 사회적 모순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시진핑은 공동부유(共同富裕)라는 테제를 꺼낸 것입니다. 그것은 선부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장기집권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즉, 초거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재력을 권력이 컨트롤하겠다는 명분으로 활용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시진핑은 자신은 총서기에 취임한 직후인 2012년부터 중국을 공동부유 사회로 바꾸겠다고 말해온 바 있다고 강조합니다. 등소평의 애당초 노선도 ‘先富에서 共富로’였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부유, 그것은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수천 년 전부터 정치의 첫째 과제라고 강조했던 주제입니다. 공산당이 집권했다고 해서 그 과제를 버린 것은 아닙니다. 관중(管仲, 719~645BCE)부터 공자(孔子, 551~479BCE)와 맹자(孟子, 372~289BCE)를 거쳐 청왕조에 이르기까지 일관했던 제일의 주제는 ‘부유’였습니다. 공자보다 몇 세대 윗 사람인 관자는 “凡治國之道 必先富民(통치의 방법론은 인민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을 첫째로 삼아야 한다)”(『관자(管子)·치국(治國)』)이라고 강조하였고, 공자도 통치술의 첫째는 인민을 배부르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曰 富之 曰 旣富矣 又何加焉 曰 敎之(염유가 말하였다. 통치를 잘하여 인구가 많아지면 그 위에 무엇을 추가해야 합니까? 인민을 부유하게 만들어야지. 부유해지면 그 위에 무엇을 추가해야 합니까? 인민을 가르쳐야지)”(『논어·자로』)라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등소평의 선부론은 사회주의 정강 정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러한 중국 고유의 통치철학에 기반한 정책일 뿐입니다. 시진핑의 공부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를 잘하면 이웃 나라에서 인민이 모여들고, 인구가 많아지면 세금을 많이 거둘 수 있으며, 세수가 많아지면 병력을 증강시켜 강국이 된다는 것이 춘추시대 이래의 부국강병책입니다.
이처럼 ‘부유해지자!’라는 테제는 중국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에, 공산주의 이념일랑 잠시 접고 일단 유리한 곳부터 부를 늘리는 정책을 취하겠다는 등소평의 선부론에 반대하는 공산당원은 없었습니다. 인민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요. 요즘 중국공산당이 강조하는 ‘중국특색사회주의’라는 구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리 우선, 실용 우선’이라는 중국 전통의 문화적 문법을 따르면서도 그것이 수정주의는 아니라고 말할 필요성 때문에 ‘중국특색’이라는 관형어를 붙이는 것입니다. 선부론은 한시적으로 용인된 수단이었고, 공산당의 원래 목표는 ‘공동부유’라고 시진핑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굶어 죽는 것은 큰 일이 아니고 절개를 잃는 것이 더 큰 일이라는 신념이 압도하는 시기가 중국사에는 많았습니다. 그 신념이 개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통치의 원리가 될 때는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예컨대 송나라의 경우, 관리의 봉록을 박하게 하고 관리의 청렴을 강하게 요구한 결과 나라 사정은 훨씬 나빠지게 됩니다.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아전들에게는 봉록을 아예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생계를 위해 기술적으로 백성을 착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왕조는 그러한 송나라를 모델로 삼아 문치국가를 이루겠다면서 5백 년 동안 똑같은 정책을 취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기는 일이 항다반사였고, 굶주려 죽는 백성이 나타나는 시기가 많았습니다. 가까이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는 대약진운동이라는 황당한 이념 때문에 수천만 명의 인민이 굶어 죽은 적도 있습니다.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그러한 역사 경험을 잘 압니다. 그들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람들도 아니고, 경험이 얕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시진핑이 황제가 되고자 사상통제를 한다는 견해들이 있는데, 그것은 중국의 역사를 통찰하지 못한 견해일 뿐입니다. 중국인들은 그들 나름의 문법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서구에서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갈등이 생기기 수천 년 전부터 경험한 방식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